[6·25 참혹한 그날의 기억] 67년 전 그날의 포성 外

등록날짜 [ 2017-06-28 14:05:08 ]

67년 전 그날의 포성
길만기 성도(88세)

1950년 당시, 22세 청년이었다. 평안북도 영변군에 살았다. 당시 평안북도는 공산주의 정권이 지배했다. 5형제 중 형 셋은 인민군에 소집됐고, 나는 아프다는 이유로 징집을 피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내가 7세 때 돌아가셔서 당시 집에는 어머니와 나, 14세 동생이 살았다.

11월 28일, 곤히 자고 있던 새벽에 포성이 울렸다.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평생 처음 들어 본 엄청난 굉음이었다. 아직도 그 날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는 북괴군이 6·25사변을 일으켜 남진하다가 국군·UN군 연합의 반격을 맞고 압록강변까지 후퇴한 후, 중공군이 개입하여 다시 국군이 밀리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여기 있다간 다 죽어. 청년들만이라도 남쪽에 가서 목숨을 건져야 한다.”

작은아버지, 동네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떠날 채비를 했다. 사실 급히 떠나야 했기에 준비랄 것도 없었다.

“어머니, 삼 일 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동생과 고향에 남기로 한 어머니에게 인사를 남겼다. 어머니는 무명 이불 짐을 내 등에 지워 주시며 추울 때 덮으라고 눈물로 당부하셨다.

피난길에는 동네 주민 40여 명이 함께했다.

피난길은 험난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며 40일간 걸어서 충북 옥천에 도착했다. 하루에 20리, 어느 날은 30리를 걸었다. 전쟁 통에 가는 마을마다 집이 텅텅 비어 있었다. 빈 집에 가서 쪽잠을 청했다. 남은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도중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바로 곁에 있던 동네 주민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끔찍한 모습을 눈물로 지켜보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가야만 했다. 눈앞에서 죽음이 오갔다. 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해 경북 영주 두메산골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전쟁의 전개 과정에 촉각을 기울였다.

하지만 부모님 곁으로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던 희망은 1952년 7월 27일 정전 협정으로 산산이 깨졌다. 그 후 67년간 생사도 모른 채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인민군에 소집된 형들은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

정월 초하루나 추석이면 임진강 망배단을 찾아간다.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읊어 본다. 지금도 6월이 오면 그날의 포성이 고막에 들리는 듯하다.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작은 섬마을에 벌어진 참사
오일문 성도(73세)

1950년 당시 일곱 살이었다. 위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로 여섯 동생과 함께 전남 진도에 살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수도 서울과는 멀리 떨어진 남쪽에 있어 이념 갈등의 여파에서 벗어나 있었다. 어느 날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는데 바다 앞으로 군함이 지나갔다. 곧이어 군함에서 불이 번쩍번쩍 했다. 우리 마을을 향해 포를 쏜 것이다. 어둠을 밝히고자 켜 놓은 호롱불을 보고 마을을 발견한 듯했다. 주민들은 혼비백산했다. 어떤 집은 포를 피해 도망치다가 화로를 뒤엎어 집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우리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것으로 사건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후, 인민군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마을에 숨어 있는 국군을 찾으러 왔다며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로 피난 와 며칠간 머문 국군 일행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떠난 후였다.

낯선 사람이 들이닥치자 개 한 마리가 시끄럽게 짖었다. 인민군은 그 개를 노려보더니 사정없이 총으로 쏴 죽였다. 마을 주민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인민군은 진도 근처에 있는 조그만한 섬, 밤섬에도 쳐들어가 그곳 마을 주민 13명을 총살했다. 그 섬에 사는 여인 중 많은 이가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었다.

잔혹한 인민군은 한 달 정도 우리 마을에 머물다가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안 돼 국군이 동네를 둘러쌌고, 인민군이 보이지 않자 다시 산을 넘어 진군했다.

세월이 흘러 나도 군에 입대했다. 전방인 21사단 양구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곳곳에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 그대로 있었다. 시체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구멍 뚫린 철모들도 상당했다. 해골을 총 끝으로 툭 치면 아스러졌다. 일곱 살 때 군인들이 마을을 점령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 시체가 그들 중 한 명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6·25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다.



인민군 총탄에 즉사한 막냇동생
여운행 성도(72세)

6·25사변이 발발할 당시 내 나이가 6세였지만 그때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 가정에 닥친 비극은 6·25사변 몇 달 전부터 시작됐다. 서울 돈암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 5남매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아버지는 고려도자기 회사 사장이셨다. 6·25가 일어나기 몇 달 전, 아버지는 직원 월급을 계산해 주려고 직원 5~6명과 밀양에 가셨다. 여관 투숙 중 그 곳에 포진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당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6·25사변이 발발한 것이다. 6세 어린아이의 눈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소방차들은 화재를 진압하려고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다녔다. 앞집 뒷집에서는 여자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시체를 날랐다. 시체를 덮은 볏짚 가마니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데도 수습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옮겼다.

하늘에 떠오른 전투기는 사람이 있는 곳마다 폭격했다. 동네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집 안에 방공호를 만들어 폭격을 피했다. 우리 가족은 앞마당에 돌부처 3개가 놓여 있는 탓에 미처 땅을 파지 못하고, 뒷집이 만들어 놓은 방공호에 끼어들어 몸을 피했다.

방공호 안은 앉아서 쪽잠을 자야 할 정도로 무척 좁았다. 하루는 네 살 막냇동생이 내 곁에서 잠을 청했는데 인민군이 방공호 물구멍에 총구를 끼어 넣어 난사했다. 그 총탄에 동생이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죽음을 목격하고도 끽 소리도 못낸 채 쥐 죽은 듯이 있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가만히 있기 어려웠던 나는 징징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어머니와 형들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 날은 오줌이 무척 마려웠다. 어머니는 당황했다. 그 말을 듣고는 함께 피신하고 있던 이웃집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밖으로 집어던졌다. 밖에는 총탄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 눈 바로 앞에 총알이 슉 지나갔다. 한 발자국만 내디뎠으면 바로 즉사였다.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덜덜 떨며 겨우 볼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다.

당시 이모는 국군 장교와 갓 결혼했었다. 인민군이 이모부를 잡으려고 우리 집에 매일 들렀다. 이모는 당시 우리 집에 숨어 있었는데 방 가운데를 깊이 파서 다다미를 깔아 입구를 가려 놓았다. 밤이 되면 이모는 인민군을 피해 그곳에 숨었다. 하루는 어머니와 이모가 집에 있었는데 그만 날아오는 총탄 두 발에 이모가 맞아 부상당했다.

방공호에 있던 나는 어머니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자 밖에 나가 어머니를 찾아 헤맸다. 어떤 할아버지가 헤매는 나를 낚아채듯이 안은 채 방공호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놈 자식아, 그러다간 우리 다 죽어!”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목숨이 왔다갔다 했다.

4개월이 흘렀다. 전쟁의 양상은 국군이 서울을 수복, 후퇴, 재수복하며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개입하여 주민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1·4 후퇴 때 아버지의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피난을 갔다. 그 후 타지에서 온갖 설움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여름철 문턱에 들어서면 6·25의 한 맺힌 아픔이 뇌리에 되살아온다. 숱한 생명을 앗아 간 6·25, 내 가족의 생명을 앗아간 6·25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다.



/손미애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53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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