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모가지도 못 비틀 사람.’ 흔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을 이렇게 부르지만 실제로 닭 잡기는 쉽지 않다. 살아 있는 생명을 자기 손으로 빼앗는 행위와 이를 저항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교차하는 끔찍함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닭의 목을 댕강 자른 후에 꽉 붙들지 않으면 몸통이 피를 분수같이 뿜으며 사방팔방 돌아다닌다. 소나 개는 더하다. 끔찍하다.
그러니 짐승을 잡아 바치는 제사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죄인 당사자가 숫양이나 수송아지 같은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장에게 간다. 그 제물의 머리에 죄인이 직접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그 짐승을 잡아 각을 뜨고 자기가 이렇게 죽을 죄인임을 고백하며 피를 받는다(레1:4;3:2). 그러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린다(레3:2;3:8;3:13). 때로는 제사장이 직접 짐승에 안수한 후 잡아 피를 내고 손으로 단의 뿔에 피를 바른다. 남은 피는 단 밑에 쏟고 내장과 기름을 모아 단에 놓고 태운다. 가죽과 똥은 진(陣) 밖에서 태운다(출29:10~13;29:19). 제사 종류가 한둘이 아니니 제사장은 항상 피투성이요, 피비린내와 고기 태운 냄새가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을 정도였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런 잔인한 제사법을 명하셨을까? 죄는 ‘추상’이 아니라 ‘실존’이요,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의 대가는 1억(億), 1조(兆), 1경(京) 정도로 값 매겨질 만큼 싸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만 갚을 수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 하나님께서는 이를 분명히 알려주시려고 죄의 삯을 대신할 상징으로서 양이나 염소나 소를 잡아 그 살을 찢고 피를 흘리게 하셨다. 왜냐하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레17:11),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레17:14)이기 때문이다. 짐승으로라도 피 흘리게 함은 오직 생명으로만 죄의 삯을 치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하지만 짐승의 피는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히10:4). 구약 제사는 모두 예수 죽이는 것을 예언한 서곡에 불과하다. 죄지은 당사자가 제물에 안수하고 그것을 죽여 피를 받는 것이 법이다. 내가 회개할 죄인이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안다면, 그 예수님을 잡아 죽인 자는 바로 ‘나’ 자신임을 알라는 뜻이다. 로마군인과 유대 지도자가 예수를 죽였고 자기는 그들 덕분에 피 공로의 혜택을 누리는 자라면, 그는 예수와 아무 상관 없다. ‘내가 바로 예수 죽인 당사자’임을 인식해야 예수 십자가의 피 공로로 죄사함을 얻는다. 헬라어 (네크로신 호 예수스)는 “그 예수를 죽였음”이라는 타동사의 능동형이다. “예수 죽인 것”을 “항상”(;판토테) “몸에 붙이고”( ;엔 소마티) “짊어지고 다님”(;페리헤폰테스)이 예수 믿는 자의 신앙고백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벧전2:5)을 명하셨다. 피비린내와 살 태운 냄새가 지워지지 않을 정도인 구약 제사장 이상으로, 예수 보혈의 향기가 떠나지 않는 오늘날의 제사장들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내가 예수 죽인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항상 마음에 새기기에 가능하다. 곧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게 될 사람들은 내가 예수 죽인 사실을 경험하고 항상 짊어지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으신 순간에도 전지하신 능력으로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기뻐하셨음을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