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마카비 혁명에서 로마제국 통치까지
구약과 신약 사이 400년간 무슨 일이 있었나(2)

등록날짜 [ 2014-11-17 17:16:01 ]

헤롯왕에 의해 스룹바벨 성전 대규모 보수 작업 이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잇는 중간시대
400여 년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알렉산더가 B.C. 323년에 갑자기 죽자 거대한 헬라제국은 그의 부하 4명에 의해 분할됐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연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에 약 250년간 지배를 받았다. 지난 호에서는 헬라제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까지 살펴보았다


3)셀루우코스 왕조의 통치시대

셀루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정권을 인수받은 후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했다. 문제는 안티오커스 4(B.C. 175~163)가 통치하던 때에 일어났다. 안티오커스 4세는 교만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여 신의 현현(顯現)’을 뜻하는 에피파네스라고 개명하였다.

B.C. 168년에 안티오커스 4세는 애굽을 공격했지만, 대패하고 말았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 신에게 돼지머리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결국, 이것이 마카비 혁명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유다 마카비는 성전을 청결케 하겠다는 일념으로 셀루우코스 왕조와 투쟁을 벌였다. B.C. 160년 엘리아사 전투에서 마카비가 사망했지만, 그 기세는 멈추지 못했다. 마카비의 형제인 요나단이 뒤를 이어서 혁명을 이끌었고, 요나단은 연이은 승리로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 B.C. 153년에 요나단은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새로운 이스라엘 왕조(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울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그도 체포되어 죽고 만다. 또 다른 형제인 시몬이 뒤를 이어 오랜 전쟁 끝에 B.C. 141년 이스라엘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4)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셀레우코스 왕조는 유다의 독립을 결국 인정했다. B.C. 63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까지 마카비의 후손들이 독립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라고 부르는데, 이는 마카비 왕조의 시조인 아스모네우스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하스몬이라고 한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시몬의 아들인 요한 히루카누스 1세 때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남쪽 에돔과 네게브 북부, 욥바와 아스돗 사이의 평야, 사마리아 인근지역, 벧산 계곡과 남부 샤를 지역까지 국경을 넓혔다. 점령한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유대교로 강제 개종하게 했다. 그런데 이때 신약 사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대표되는 종파 간 갈등이 심각했다.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끝없이 투쟁했다. 특히 이들은 율법관에서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바리새파는 후대에 탈무드로 대변되는 구전 율법과 글로 된 모세오경 즉 성문 율법을 모두 성경으로 인정하며 예언자들의 가르침도 성경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오직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알렉산더 아네우스는 영토를 더 확장했으며 특히 예수께서 탄생할 때 있던 헤롯 대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터를 유다 남쪽 이두메 지방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B.C. 63년에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의 통치 시대가 시작됐다

5)로마시대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64년 전인 B.C. 64,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수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정복했다. 1년 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복잡한 왕위 다툼에 개입하여 하스모니안 왕조를 억누른 후 식민지로 삼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예수께서 탄생했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열두 제자를 길렀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에게 메시아가 어디서 탄생하는지 물어보고 베들레헴 근처에 살던 두 살 이하 모든 남자아이를 죽인 헤롯 대왕은 누구일까?

로마는 파사엘과 헤롯을 유대의 공동책임자로 임명한다. 헤롯 대왕은 유다 왕이 갖추어야 할 정통성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다지파와 유다지방 출신이 아니라 이방에 가까운 이두메 출신이기에 정통성이 없는 것이다. 그는 이를 보완하고자 유대인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초라한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다. 그 규모와 비용은 실로 천문학적이었지만, 이 성전도 예수께서 예언한 대로 A.D.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졌다.

위 글은 교회신문 <41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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