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매달 첫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월삭

등록날짜 [ 2015-02-02 12:59:28 ]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 잊지 말아야

월삭에는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28:11).

불빛이 없는 밤하늘에서 가장 큰 빛은 달빛이다. 이스라엘 유대 광야나 요르단 지방을 밤중에 여행하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수많은 별을 보면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또 영롱하게 빛나는 달을 보면 금방 동심으로 돌아갈 듯하다.

그믐이 지나면 달이 보이지 않게 된다. 온 세상이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칠흑 같은 어둠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다가오는데 그 날이 바로 월삭이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생명이 연장됨을 실감할 수 있는 징표가 바로 월삭(月朔, 그 달의 초하루)이다.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성경은 월삭을 통해서 한 달 한 달을 묶어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였다.

사울 왕은 물론이고 다윗 왕도, 솔로몬 왕도 월삭을 지켰으며 이스라엘 백성도 월삭을 지켰다. 유목생활과 농경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초하루가 중요한 절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모세의 명을 좇아 매일에 합의한 대로 안식일과 월삭과 정한 절기 곧 일 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대하8:13).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통에서 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46:3).

월삭 중 특히 7월의 월삭을 중시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23:24).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이후 월삭은 그 중요성이 더욱 증가하였다(8:2). ‘초하루’(10:10;왕하4:23;81:3), ‘새 달’(5:7)로도 일컬어졌다.

그러나 월삭도 안식일과 다른 절기처럼 인간에게 참기쁨을 주지 못했다. 월삭의 정신을 살릴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곧 죄악성 때문이다. 결국 첫 월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정신에 맞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

이스라엘 백성은 월삭이 되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면서 교제하였다.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삼상20:5).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섰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으나”(삼상20:24~25).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선지자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 남편이 가로되 초하루(월삭)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왕하4:23).

물론 이날은 안식일과 같이 장사하는 일과 노동을 멈추고 쉬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8:5).

이와 같이 월삭에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면서 소제를 드렸다. 또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매월 첫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자복하고, 속죄의 은혜를 받고, 가족과 가까운 이웃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감사의 정신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안식일 이외에도 매월 첫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이 월삭 정신을 살려서 때와 절기에 맞춰 감사예배를 드리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남다르다 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42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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