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125)] 성경의 바른 교훈이 우리를 담대하게 만든다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125)

등록날짜 [ 2016-07-19 10:10:42 ]

죄는 부끄럽게 만들고, 순종은 자신만만하게 하니

세상 끝나는 마지막 날에 당당하게 주님을 만나야

세상에는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겉으로는 법을 준수하는 듯 보여도 속으로는 법망을 피해 교묘히 속입니다. 선거철에 보면, 후보자가 많이 나와서 선거 운동을 벌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 지역을 책임지고 발전시킬 정직하고 능력 갖춘 적임자라고 대대적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다가 각종 단체에서 뒤를 캐고 비리를 파헤쳐 낙선운동을 펼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하늘을 찌를 듯 당당하던 면모는 일순간 사라지고 양양하던 의기가 꺾여 벌벌 떱니다.

 

반면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 후보자는 담대합니다. 자기 이름이 낙선자 명단에 오를 리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는 두려움을 낳습니다. 사람은 양심에 걸리는 일이 없어야 매사 자신만만합니다. 솔직하고 정직할 때 담대합니다. 숨겨놓은 죄가 있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잘못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창세기 3장을 보면,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이르신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먹자마자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발견했고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 날 저물 때 하나님께서 동산에 나타나시자 그들은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며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제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어겼기에 하나님 앞에 나올 담대함이 없었습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면 담대함이 사라집니다. 담대함은,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지키고 죄를 이겨야 나옵니다. 그러기에 주님 안에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에게 묻습니다. “내가 먹지 말라 한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부리나케 변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저 여자가 줘서 제가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했느냐?” 하와 역시 변명합니다. “뱀이 나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죄를 지적받자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면서 자기 죄를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아담에게 하와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아내입니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진심으로 서로 한 몸으로 여기며 사랑하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던 부부가 죄를 범하자 부끄러워 자신의 몸을 가렸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죄가 발각된 순간 두려워서 변명하며 죄를 떠넘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성도는 자기 영혼을 지키고 섬겨 주는 성령 충만한 목사를 만날 때 죄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담대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못 하는 이유를 대면서 변명하기에 바쁩니다. 예배에 빠지고 충성에 게으르고 기도하지 않는 자기를 이해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남이 내 잘못을 감싸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변명하지 말고 속 시원히 회개해서 예수 십자가의 피 공로로 죄사함받아 깨끗이 씻고 담대해야 합니다.
 

성경의 바른 교훈이 우리를 바르게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에서 자기의 몫을 받아 집을 떠날 때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돈이 떨어지자 함께 향락에 빠지던 친구들은 누구 하나 자기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돼지치기로 전락했고, 그나마 돼지 먹는 쥐엄열매조차 마음껏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를 떠나온 것을 후회하며 눈물 흘립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나는 이제 아들의 자격도 없구나. 그래도 굶어 죽느니 아버지 집에 돌아가자. 품꾼으로 써달라고 하자. 비참한 신세를 면하자.”

 

탕자는 자기 집에 돌아올 때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 스스로 품꾼으로 써달라고 밑바닥까지 낮아졌습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자신이 아버지 재산과 자기 인생을 탕진하며 방탕하게 살아온 일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자기를 비겁하고 부끄럽고 추하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듭니다.

 

탕자가 집 가까이에 왔을 때 아버지는 저 멀리 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꼭 껴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비록 누추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돌아왔지만 너는 내 아들이다.”

 

하인들에게 명해서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게 하고 큰 잔치를 벌여 아들의 무사귀환을 기뻐하자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1:19). 우리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씻어주시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게 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할 때입니다. 예수의 피로 잘못된 우리를 바르게 고쳐주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바른 교훈은 우리를 바르게 합니다. ‘바르다’는 담대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는 그 날에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요일2:28).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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