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⑩] 죄 뒤에 숨어 활동하는 마귀 정체를 알라

등록날짜 [ 2018-07-19 13:22:22 ]

마귀는 항상 정체 감추고 활동하기에
영적으로 어두우면 모르고 당할 수밖에
타당한 이유로 우리를 죄짓게 하나
하나님과 관계 끊으려는 수작이니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에 속아선 안 돼



영적으로 어두우면 망한다

예수를 판 유다를 보십시오. 유다는 재정을 담당하던 제자였습니다. 유다는 왜 예수를 팔았을까요? 이에 대한 단서가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습니다. 당시에 장정이 하루 열심히 일하면 받는 돈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300데나리온이면 약 300일 치 품값입니다. 지금 시대로 하루 품값을 10만 원으로 잡아서 계산해 보면  3000만 원어치나 되는 값비싼 향유입니다. 그런 비싼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고 입을 맞추며 자기 머리털로 닦는 여인을 보고 유다가 발끈해서 말했습니다.

“저거 너무한 것 아니냐? 주님은 왜 저 여자가 저렇게 하도록 놔두는가. 저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저것을 깨뜨려 발에 부어?”

여기서 우리는 유다가 돈에 대한 집착과 야욕이 가득하고 오래전부터 예수에 대한 불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상당히 거룩한 척하며 말했지만 이 사건에 관한 성경 기록을 보면 그의 실상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맡은 자였는데, 거기 넣은 돈을 훔쳐 가는 도적이라고 했습니다(요 12:4~6). 그리고 요한복음을 보면 유다를 움직인 정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유다에게 넣은 것이 마귀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넣는 것이 마귀인 줄 안다면 마귀가 주는 생각을 받아들였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평불만하는 것이 사실은 육신의 소욕을 통해서 마귀가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 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어둡기 때문에 마귀역사임을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스스로 여기게 해서 더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죄로 오염시킵니다. 마귀는 언제나 합리적으로 죄를 짓게 만들지 절대 비합리적인 방법이나 비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두움입니다. 유다는 예수를 따라다닐 때부터 이 마귀의 생각을 따랐기에 어두움에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두움에 휩싸여 예수를 팔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유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계속합니다. 자신이 팔아넘긴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받았던 은 30을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가 자신이 무죄한 피를 흘렸으니 예수를 도로 물러 달라고 말합니다. 양심이 다시 돌아온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고 말았습니다.

결국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자 스승을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이 유다 속에서 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뭘 하겠냐’며 나무에 목을 매 죽습니다. 그 목맨 것이 그만 땅바닥에 뚝 떨어져 창자가 터져서 죽었습니다(마 27:3~9).

양심에도 하나님이 움직이는 양심이 있고 마귀가 움직이는 양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심은 회개하게 하지만 마귀가 주는 양심은 자책으로 끝납니다. 회개하면 살길이 열리지만, 자책하면 병들어 죽기도 하고, 사고가 나서 죽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일으키고 맙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 마귀역사가 사람의 양심을 그르게도 만들고 바르게도 만들어서 마음껏 가지고 놀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어두움으로 역사하여 인간을 무지하게 만들어 스스로 멸망하게 합니다. 마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라고 했습니다(요10:10). 마귀는 영적으로 어둡게 하여 도둑질을 당하는 것도 모르게 하고, 죽이는 것도 모르게 합니다.


정체를 감춘 적과의 싸움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아담은 “당신이 예쁘게 만들어 준 하와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잖아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하와를 안 만들어 주셨으면 자신에게 선악과 먹으라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선악과를 먹을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변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어 주었고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자신에게도 주어 먹게 했으니, 따지고 보면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임기응변이 대단합니다. 논리적으로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일러 주셨는데 어째서 아담과 하와의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그러고도 뻔뻔하게 억지를 부립니다. 아담은 하와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하고, 하와는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뱀에게 너는 왜 먹으라고 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죄가 바로 마귀에게서 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죄를 지었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반드시 그 뒤에는 그렇게 만든 자, 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했습니다(요일3:8). 우리가 항상 이것만 볼 줄 알면 전쟁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그 정체만 드러나면 물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두움의 주관자인 그놈이 정체를 감추기 때문에 이 싸움이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인 유다가 만약에 마귀가 예수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것을 받아들였겠습니까? 하와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고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할 때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요, 자기를 죽이려는 마귀역사라는 것을 알았다면 받아들였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잘되게 해 준다, 좋게 해 준다, 행복하게 해 준다”면서 속입니다. 그 조건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는 수작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8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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