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25] 변덕 떨지 않는 신앙생활

등록날짜 [ 2018-11-14 14:36:12 ]

변질되지 말라
바나나 밭에 가보기 전에 저는 바나나가 한 나무에 한 송이씩 열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크고 긴 대같이 생긴 가지 하나에 바나나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자라는데 한 나무에서 족히 두 상자는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많이 붙은 바나나 중에 꼭 썩은 게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나무에 똑같이 붙어 자랐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썩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썩은 것은 아무리 바나나 몸체에서 영양을 공급해도 그냥 썩어서 고사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바나나처럼 교회에 다닥다닥 붙어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그냥 겉으로만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심령 안에서 설교 말씀이 살아 역사하지 않으면 그는 썩은 바나나와 같습니다. 썩어버린 열매는 상품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은 썩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신령한 상품 가치가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여집사는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지 않았으면 예수 안 믿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춤이나 추고 놀러 다닐 가능성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21살 때 골수암 진단을 받았는데 병원에서는 최대한 빨리 다리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리를 잘랐으면 지금은 목발 짚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때 그 집사는 다리를 끊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낫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석 달에 한 번 교회에 오곤 했습니다. 자기 엄마가 그렇게 교회 가자고 해도 안 오고 석 달에 한 번, 어떤 때는 두 달에 한 번 왔습니다. 교회 와서도 오기 싫은데 억지로 온 것처럼 뾰로통해 앉아 있으니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놀러 다녀야 하는데 교회에 와서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한 병원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큰 병원  세 곳에서 모두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다리를 끊어야 살 수 있는데, 그것도 빨리 끊어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다리를 의사가 왜 끊으라고 그러냐? 놔둬야지.” 

자기 엄마 등에 업혀 절망 속에서 교회에 찾아온 21살짜리 자매를 하나님은 그날 밤 내내 기도하게 하고 회개하게 만드시더니 마침내 다리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절단 수술  없이 믿음으로 고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어도 그동안 변덕을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육신의 소욕과 육신의 생각은 육신이 좋은 대로만 살려고 합니다. 육신이 좋은 대로 따라가다 보면 변덕을 떨게 되어 있습니다. 변덕 떨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육신의 소욕이 아닌 내 영혼이 좋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행동하는 것이 내 영혼이 좋은 대로 하는 것인지, 내 육신이 좋은 대로 하는 것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변하면 아까워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버림받는 자가 되지 말고 싱싱하게 살아서 주님과 신령한 동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영적인 가난 
우리 신앙생활은 각각 예수로 거듭난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각자의 믿음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냉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환경이나 여건 탓으로 돌리지 말고 ‘그런 이유들을 만들어서 역사하는 이것이 나를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마귀역사구나!’ 하고 즉각 떨쳐버려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은 남이 내 멱살을 잡고 늘어져도 손을 딱 뿌리치고 밀어낼 수 있습니다. 악한 자가 아무리 우리의 멱살을 잡고 늘어져도 뿌리칠 힘의 능력이 있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충성하다가, 기도하다가 그만둔 사람은 영적 싸움에서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적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귀는 세상이라는 무기, 육신의 소욕이라는 무기, 환경이라는 무기로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의 역사, 구령의 열정, 기도하고 싶은 마음, 찬양하고 싶은 마음, 충성하고 싶은 마음, 주를 향해 살고 싶은 마음을 모조리 도려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온갖 무기를 사용해 모조리 다 빼앗아 가도 공허한 줄 모릅니다. 빈털터리가 된 자신을 어찌할까 하는 걱정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당했다는 것을 큰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돈보다 귀하고 목숨보다 소중한데 이 큰 것을 빼앗기고서도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중요한 정도로 따진다면 영적인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해 더 허탈해해야 하고, 영적으로 더 근심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신령한 것을 다 빼앗기고도 허탈해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나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을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자 졸며 잡니다. 그런데 신랑이 올 때까지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드디어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는데 자기 등불은 꺼져가고 기름은 없습니다. 그때서야 “기름이 없네! 큰일 났구나! 기름 좀 나눠 씁시다”라고 해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겪는 물질의 가난은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가난을 극복하고, 영적인 빈곤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느끼지 못하니까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빼앗기지 말고, 영적인 가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대로 우리의 영적 생활을 방치해 둘 것입니까? 우리는 다시 주 안에서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9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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