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26] 신령한 여유가 넘치는 신앙생활

등록날짜 [ 2018-11-15 13:30:01 ]

신앙생활의 풍부한 자원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먹을 것이 없어 굶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먹기 싫어서 못 먹는다고 하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입니다. 자원이 없으면 그냥 이렇게 굶어 죽어야 합니다. 
어떤 재벌 한 분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너무 연로해서 육신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저 사람이 재벌이란 말인가?’ 생각하니 참 답답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굉장한 부자 같지만 과연 그 사람이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까? 너무나 여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육신의 기력이 다해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가 재물이 많아 부유하더라도 여유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신앙생활 할 기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 할 능력이 없는 사람, 자원이 뚝 떨어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른 여유는 다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자 하는 여유만 충만하면 됩니다. 이 여유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는 여유가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부유할 때 더 여유가 있고 그 여유가 있어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유가 없으면 교회에 가는 것조차 늘 갈등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여유가 있어야 핍박을 이기고 시험도 이깁니다. 누군가 교회에 못 가게 핍박할 때, 자기 속에서 ‘맞아 죽어도 가야 하고 어떻게 하든지 교회는 가야 한다’는 믿음의 여유가 넘치면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6:10)라는 성경 말씀은 주님 안에서 아무도 그의 신앙생활을 넘어뜨릴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앙생활의 일인자, 강력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신앙생활의 충분한 자원을 공급받으라는 말입니다. 그 힘을 공급받는 방법은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 됩니다. 
 
신령한 여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나는 맞아 죽어도 좋다. 너희들 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 너희가 저주해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너희 죄를 담당할 너희 구세주다. 예수 믿어라!”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여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어 가는 순간까지도 얼굴이 천사같이 환하게 빛나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했으니 얼마나 믿음에 여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적인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여유를 가지고 주님 나라까지 가야 합니다. 이런 여유가 없이 어떻게 순교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믿는 자들을 환난에 넘겨주고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한다고 했습니다(마24:9~13). 말세에 예수 믿는 자가 당하는 온갖 고통과 핍박은 인간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육체로는 정말로 버틸 수 없는 최악의 경우에 그것을 이길 여유가 없으면 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핍박과 시험과 고통이 올지라도, 세상이 어떤 것으로 유혹할지라도 이길 만한 여유가 충만해야 합니다. 사람은 돈을 벌어서 계속 쌓아 놓기를 원합니다. 돈의 여유, 물질의 여유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비축해 놓음으로써 생기는 여유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뭐, 그렇게 허구한 날 기도하냐?”고 묻습니다. 낮에는 직장에 가고 저녁에 와서 기도하는데 누가 허구한 날 기도합니까? 그러면서 “사람이 여유가 있게 살아야지” 하고 투덜댑니다. 그러면 죄짓고 타락하고 망하고 무사안일하게 세상에 푹 빠져 놀러 다니는 것이 여유입니까? 
우리가 누릴 여유는 죄를 이길 능력의 여유, 질병을 이길 능력의 여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넘치는 여유와 같은 신령한 여유입니다. 여유라는 말은 충분히 쓰고도 남는다는 말이니, 신앙생활 하고도 남는 여유,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죽도록 충성할 만큼 해야 하는 이유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해야 할 이유와 지식을 빼앗기고 또 그런 것을 느낄 만한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마귀역사에게 차단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한 번 신앙생활 잘해 보기로 마음먹었으면 후퇴가 없어야 합니다. 강건한 자는 그 결심이 깨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기서 거기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신앙생활은 전쟁입니다. 영적생활은 전쟁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하늘나라까지 밀고 가야 합니다. 후퇴는 없어야 합니다. 육신의 소욕 때문에 후퇴할 수는 없습니다. 육신의 소욕으로 점령당할 수는 없습니다. 마귀는 세상을 총동원하고, 육신의 생각을 집합시켜서 우리를 아주 점령해 버리고 신앙생활의 패륜아로 만들어 버리려고 끈질기게 미혹합니다. 이런 마귀역사에 영적으로 처절하게 당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영혼의 처절함을 전혀 모릅니다. 이런 안타까움 속에서 살아가도록 나를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신령한 여유를 되찾아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9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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