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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영혼 주님처럼 섬기겠습니다”
등록날짜 [ 2010-06-15 08:13:45 ]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 선교사 통해 예수 영접
일제 광복 후 경북 울진에서 무너진‘교회’재건에 힘써
문규석(文圭錫) 목사는 1889년 7월 16일 경북 울진군 울진읍 화성리 273번지에서 아버지 문영모 씨와 어머니 이내곡 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당시 유일한 교육기관인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시작으로 10년간 한학을 공부했다.
1910년 우리나라는 일제 강압으로 한일합방을 체결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애국지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가했다. 그러나 우리 애국지사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전국 각처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민간인들로 구성된 독립군이 조직되어 일제에 저항했다. 문규석도 이때 애국운동 단체에 들어가 일본에 저항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로 예수 영접
일제의 탄압은 날로 노골화되면서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불가능해졌다. 독립운동을 하던 지사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러시아 등으로 피신할 때 문규석도 이들과 함께 만주로 피신했다. 강압에 의해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세계 각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회를 통해 항일민족 세력에게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교육과 강연회를 열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3.1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만주로 피신한 문규석은 독립군들에게 사기를 진작하고 용기를 북돋기 위해 독립운동가(歌)를 작사했다. 조선인들은 문석규가 작사하여 만든 독립운동가를 즐겨 부르며 독립하는 그날을 기다렸다. 또한 독립운동가가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조선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만주가 일제 손아귀에 들어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에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다른 은신처를 찾아 흩어졌다. 문규석도 밤낮없이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고달픈 생활을 했다. 몸은 지치고 마음에는 외로움이 엄습하면서 자기를 위로하고 의지할 수 있는 피난처가 필요하였다.
이때 문규석의 눈에 들어온 것이 선교사들이었다. 독립군들을 도와주고 숨겨주기도 한 몇몇 선교사를 알고 있던 문규석은 1911년, 25세 때인 어느 날 교회를 찾아갔다. 선교사는 문규석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선교사가 전해 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교회생활을 했다. 문규석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가가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변 보호를 받으면서 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일제는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저해 요인으로 제일 먼저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일제 광복 후 교회 재건 힘써
문규석은 성실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 또한 젊음과 열정을 주님을 위해 모두 드리기로 하고 만주 일대를 자신의 구역으로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문규석은 1919년 교사 직분을 받았으며 15년 동안 주님의 기쁜 소식을 만천하에 전하다가 1934년 제29회 대화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다 신사참배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교단 교역자들과 함께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어 무서운 고문을 받고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문규석 목사는 조국 재건과 더불어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9월, 이승만 박사를 정점으로 대한 독립 촉진군민회를 결성하고 울진군 지부 위원장에 취임하여 일제 36년 동안 무너졌던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우고 울진 지역 발전에 공헌했다. 또한 문규석 목사는 울진 지역을 안정하게 이끄는 한편 울진 구역과 울릉도 구역에 있는 일제 만행으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는 데 힘을 모았다.
문규석 목사는 아버지로서 자녀 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문규석 목사의 교육방법은 솔선수범이었다. 한 예로 주일에 자녀에게 헌금이나 감사헌금 등을 주어 각자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하였고, 가정예배 시간에는 자녀에게 기도하도록 했다. 봉사할 일은 자신이 찾아서 하는 습관이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처리하도록 배려하는 자상함을 보였다.
문규석 목사는 1949년 3월 26일 향년 60세를 일기로 하나님 나라에 편안히 잠들었다.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가로, 이 땅에서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 나라로 옮겨 간 것이다. 당시 4대 독자인 문제익 목사를 이 땅에 남겼으며, 오늘까지 문규석 목사 후손들이 3대째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9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