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 천부적인 달란트로 찬송시를 지은 여류작가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1820~1915)

등록날짜 [ 2013-11-12 15:52:14 ]

태어나면서 시력 잃었으나 시작(詩作)에 재능 넘쳐
오십 년 반평생 동안 찬송 시 무려 8000여 편 남겨

<사진설명> 패니 크로스비.

패니 크로스비는 1820년 3월 24일 미국 뉴욕에 있는 작은 마을인 퍼트남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6주 만에 패니는 심각한 눈 염증을 앓았다. 담당 의사가 부주의하게 처방해 결국 패니는 시력을 잃었다. 패니가 한 살이던 해에는 아버지가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크로스비 가문은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 집안으로 신앙심이 깊었다. 패니는 열 살 때까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패니는 자랄수록 청각과 미각, 후각과 촉각이 예민하게 발달했다. 손재주가 좋았으며 영리하고 똑똑했다. 할머니는 어린 패니에게 성경 이야기를 은혜롭게 들려주었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가르치며 손으로 만져 보고 코로 향긋한 향기를 맡게 했다. 특히 자연이 움직이는 모습을 성경 말씀과 연관 지어 설명해 주었다.

패니가 열 살 때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와 신약성경 사복음서를 암송하여 낭독했다. 할머니는 성경뿐 아니라 문학작품도 많이 읽어 주었다. 그러나 패니는 앞을 볼 수 없어 막막하고 답답했다. 그때마다 패니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나와 언제나 기도하는 큰 바위에 가서 하나님께 위로를 구했다.

패니가 열한 살 때 패니의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가 세상을 떠났다. 1835년 3월 3일 패니 어머니는 뉴욕에 있는 맹인학교에 패니를 등록했다. 패니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니는 학교에서 상주 시인 자리에 올랐다. 교장은 패니가 자만할까 염려해 자만에 빠지지 않게 주의하라고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께 받은 재능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권했다.

패니는 “교장 선생님 말씀은 내게 폭탄과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은 몇 달 후에 발생했다. 교장은 패니에게 3개월 동안 어떤 시도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는 어린 소녀에게 큰 시련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의식적으로 시를 쓰지 않을 때에도 시상이 끊임없이 마음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뉴욕 맹인학교에 방문한 골상학자인 조지 콤 박사는 패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조지 콤 박사는 뛰어난 성적을 보인 맹인학생 골상을 연구하던 중 패니의 일생을 좌우할 판결을 내렸다. 당시 패니는 학교가 내린 지시에 따라 시 창작을 억누르며 다른 과목을 고루 익히고 공부하느라 무기력했다. 조지 콤 박사는 패니에 관한 제재를 풀어 달라고 학교에 요청했다.

이에 학교 교장 존스 박사는 패니를 사무실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마음껏 네가 원하는 만큼 시를 써 보렴.” 패니를 가르치고자 특별 교사를 지정했고 훌륭한 작가로 키우라고 지시했다.

1844년 패니는 생애 최초로 시집을 출판했다. 그 다음 시집은 6년 뒤인 1851년에 출판했다.

1846년 전염병인 콜레라가 만연해 수많은 목숨을 일시에 빼앗아 갔다. 이를 보며 패니는 자기 신앙을 돌아보았다.
 
“만일 콜레라가 내 생명을 빼앗아 갔다면 나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했을까?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또 다른 무언가를 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때마침 브로드웨이 예배당에서 부흥집회가 열렸다. 이곳에 참석한 패니는 찬송가 141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를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한 손에는 세상을, 다른 한 손에는 주님을 잡고 있던 자신을 보았다. 회개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이 체험으로 패니는 예수님 사랑에 푹 빠졌다.

맹인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패니는 1858년 같은 학교 교사인 알렉산더 반 알스틴과 결혼했다. 남편은 패니가 다니던 학교 선배로 패니처럼 시각 장애인이었다. 알렉산더는 음악적 재능이 있어 패니가 지닌 시적 재능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1850년대와 1860년대 초반, 패니는 대중이 정겨이 부를 서정적인 노래를 작사했다. 그중 일부는 음유시인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864년 2월 2일, 패니는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패니는 저명한 찬송 작곡가이자 출판가인 윌리엄 브래드버리를 만났다. 이로써 패니는 첫 복음성가 ‘저 하늘에 빛나는 우리의 본향’을 출판했다.

당시만 해도 앞으로 51년 동안 패니가 하나님께 이끌려 찬송 8000여 곡을 지으리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패니 크로스비는 어떻게 찬송가에 붙을 서정시를 쓸 수 있었을까? 패니는 마음 상태가 최적에 도달할 때까지 늘 회개하며 기도했다.

“나는 시 쓰기에 앞서 기도해요. 좋으신 주님께 내가 쓰려는 시에 영감을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찬송가를 써 본 적이 없어요.”

패니는 그 당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던 복음 전도자 무디와 미국 전역을 순회했다. 자신이 경험한 간증과 찬양으로 수많은 이를 주님께 인도했다. 그러나 생활은 언제나 가난했다. 출판사에서 패니가 지은 시 한 편에 1~2달러(당시 달러 가치) 정도만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첫 찬양곡집을 출판하여 받은 얼마 안 되는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에 집세를 못 내 쫓겨날 처지가 됐으나 어떤 낯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10달러를 놓고 가서 위기를 모면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패니를 지키고 계셨다.

패니 크로스비는 95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열정적으로 찬송시를 썼다. 우리 찬송가에는 패니가 지은 대표작 중에 20여 편이 실렸다.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6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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