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순교자 수를 채우기 위해 오늘을 살자

등록날짜 [ 2012-01-19 16:51:41 ]

예수 재림의 조건 중 하나 ‘순교자의 수’가 차는 것
영혼 구원을 위해 죽는 자 그 ‘영광’이 가장 크다

몇 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샘물교회 단기 선교팀이 오랫동안 현지 무장 세력에게 붙잡혀 온 국민이 가슴을 태우며 석방을 바랐으나 두 명이 총살을 당해 길가에 버려진 후 조국에 돌아왔다. 당시 우리는 가슴 졸이며 분노와 탄식 그리고 안타까움으로 몇 날을 지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름대로 무수한 질문을 했다. 그들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하늘나라에 특별 초대받은 사도 요한이 아주 놀라운 일을 목격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봉 일곱 개를 하나씩 떼실 때마다, 장차 세상 종말에 있을 사건들의 영상이 매우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다. 마침 주님께서 다섯째 인을 떼실 때(9절),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간 순교자들이 부르짖는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6:9~10).

피 값을 갚아 달라는 호소
여기 순교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주님의 증인으로 봉사와 전도와 선교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며 죽어간 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피 값을 갚아 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송곳으로 찌르듯 욕설로 자존심을 부서뜨리고, 잔인하게 고문하고 처절하게 죽이던 인간의 죄는 어찌하시렵니까? 성도를 향하여 자행하는 저 인간 만행을 언제까지 두고만 보시렵니까?” 하고 울부짖는 듯하다.

오늘 우리도 왜 그토록 교회에 충성하며 선교의 갸륵한 헌신으로 타국에 갔던 하나님의 자녀가 왜, 왜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이제 막 마흔을 넘어선 젊은이가 그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을 두고 순교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까? 솔직한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의 응답
여기에 하나님의 뜻밖의 대답이 나온다.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계6:11). 주께서 순교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주목해 본다.

첫째로, 이들에게 잠깐 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범사에 때를 따라 역사하신다.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무리를 속히 심판하시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아직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들에게 잠깐 쉬라고 하셨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했다. 그들은 세상의 사악한 자들과 멀리 떨어져서 쉬고 있다. 그들은 땅 위의 모든 눈물과 애통함과 고난과 죽음에서 벗어나 쉬고 있다. 그게 언제까지인가?

둘째로,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순교를) 받아서 그 수가 차기까지”란 말이 가슴을 섬뜩하게 한다. 이 순교자의 수가 찰 때까지 죽임을 받게 될 자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두 증인이 증거를 마칠 때까지 악한 세력들에 의해 순교가 계속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계11:7). 끝이 있기는 있는데, 하지만 아직은 기다려야 할 기간이라는 것이다.

그 기다리는 동안에는 여전히 지금까지 순교 당한 자들과 같이 순교의 피를 계속 흘리게 될 것이고 마지막 때 순교자들의 수가 차기까지 죽임당하는 희생이 계속될 것을 말한다.

세상에 주님을 증거해야 할 곳이 아직 남아 있다. 이 증거를 방해하고 적극적으로 막는 악한 사단의 세력이 아주 치열해질 것이다. 순교자들의 수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 순교자들을 위한 자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이미 죽은 순교자들의 죽음처럼 여전히 십자가의 길 곧 순교의 행진이 계속될 것이다. 그중에 내가 있을 수도 있다.

심판과 재앙은 다가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땅에 있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는 순교자들의 호소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의 피 값을 신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요엘 3장 21절에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 흘림 당한 것을 갚아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주리라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고 했다. 즉,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순교자의 수가 채워지는 순간 이들이 호소한 대로 이 땅에는 일곱 대접의 재앙과 저주 그리고 사망의 심판이 무섭게 내린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괴로운 보응이 임하는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런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다. 초대교회 때처럼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앞으로 우리 기독교 박해의 핵심 세력이 돼서 순교자의 피를 흘릴 것이다. 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더욱 절정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순교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다.

그렇지만 순교는 단지 핍박받는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단번에 죽는 일은 오히려 쉽다. 자기를 이기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자기를 이기는 자도 역시 순교자다. 이 세상이 주는 욕심과 자기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이 바로 순교다. 

위 글은 교회신문 <27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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