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협력자인가, 훼방자인가

등록날짜 [ 2014-02-18 11:30:57 ]

인간의 생각으로 구원의 역사 판단해서는 안 돼
생명으로 이끄는 중계자 역할 제대로 수행해야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과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귀신들린 딸을 고치려고 예수께 나온 수로보니게 여자를 보면, 우리는 여자의 딸이 얼마나 믿음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러 온 아버지 이야기에서도, 그 아들의 믿음을 알 수 없습니다. 혹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풍 병자의 친구들은 중풍 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오지만, 여기서도 중풍 병자의 믿음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이들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추측하더라도, 사실상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들에 관해서 다른 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딸을 고치려고 ‘개’라고 불리는 모욕을 감수한 어머니의 믿음, 자기 아들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과 싸운 아버지의 믿음, 지붕을 뜯어낸 친구들의 믿음은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딸과 아들과 친구를 살렸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사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을 염려하던 사람들의 믿음이 어떻게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이끄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보다 보면, 다른 사람의 믿음을 탓하던 일이 조금은 미안해집니다. 어떤 이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내’ 믿음이 그를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며 애절하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와 동행한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예수께 데려오던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바디매오를 꾸짖는 사람들의 모습은 놀랍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바디매오가 예수의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었으니, 빨리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해야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이 분명히 달랐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바디매오를 데려오라고 하였고, 바디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 예수를 따릅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예수께 데려와서 그들 삶을 변화시키는 중계자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조차도 예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훼방자로 일했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다른 이들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누군가가 생명의 길에 거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를 생명으로 이끌지 못한 ‘나’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꾸 고민하게 합니다. 내 삶이 누군가를 생명으로 이끌 수도, 누군가가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호경 교수
서울장신대 신학과

위 글은 교회신문 <37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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