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복음과 문화의 충돌에 따른 고민과 해답

등록날짜 [ 2015-06-16 14:24:30 ]

문화를 복음 전파의 도구로 활용할 수는 있어도

그것에 끌려다녀는 혼합주의는 반드시 경계해야

 

얼마 전 지인의 고충을 들었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던 친구가 어느 날 이른바 ‘문화 사역’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았습니다. 그 친구는 같은 산맥 속에 여러 산봉우리가 있듯이 모든 종교가 동일하며 맥이 같고 문화를 통해서 신을 동일하게 만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편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교회를 떠나 다른 길을 갔다는 내용입니다.

 

헬라-로마 문화에서 유행하던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의 질긴 흔적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마치 이 시대의 새로운 이론처럼, 지성적인 사조처럼 보이는 이 사상은 이미 오래전에 흘러간, 실패한 주장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는 산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로 위장한 바이러스가 유일한 구원의 소식인 ‘오직 예수의 복음’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도전의 역사는 2000년 동안 지속됐고, 복음은 그 자체의 힘으로 언제나 승리했습니다. 세상의 종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승리할 것입니다.

 

복음의 불모지에 복음이 전파될 때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복음과 문화의 관계 설정입니다. 어떤 면에서 문화는 일상생활입니다.

 

유대인에게 유대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인 동시에 일종의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일상생활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일상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문화에서 출생하지 않은 사람들과 복음을 알지 못하던 사회 구조에 살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 복음은 일상생활의 변화를 요구하므로 충격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가 복음을 변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문화를 계도하고 복음 전파의 도구로 활용하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도 복음과 문화의 충돌에 따른 고민의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복음과 문화가 대립했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여 주는 보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때 이방인들의 관습을 어떻게 수용할지, 유대 율법주의에 물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수용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전합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행15:8).

신학자들은 베드로의 증언이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 회의는 문화가 복음보다 우선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복음의 전파와 수용에 대한 유연성을 제시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8~29).

 

복음은 우리가 예수의 인격, 성품, 사역을 닮게 하는 핵심 동인입니다. 문화가 복음을 수용하여 문화의 도구로 전락하게 하는 유혹에 물들지 말고 ‘오직 예수의 복음’이 문화와 생활을 바꿔 놓아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의 선포는 다양성 존중과 소수자 차별금지란 명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도전하는 이 시대의 풍조에 큰 경종을 울립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김선배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위 글은 교회신문 <43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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