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예수의 생애 전체는 분리할 수 없다

등록날짜 [ 2016-03-17 15:14:37 ]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어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 되어야 인류 구원 이뤄져

 

 

사례1) 누가 더 좋을까

 

부모가 자녀에게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아빠가 좋아? 아니면 엄마가 좋아?” 자녀는 곤란한 상황에 당황한다. 나도 어린 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일이 있다. 그때 딸아이는 답했다. “어떤 때는 아빠가 좋고, 어떤 때는 엄마가 좋아.” 우문현답이다.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라고 요구하는 아빠의 짓궂은 질문에 솔로몬의 지혜 같은 대응이었다.

 

 

사례2) 무엇을 먹을까

 

나는 단팥빵을 좋아한다. 빵집에 가면 본능적으로 집어 들 수밖에 없는 빵이다. 그 유혹의 중력을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이 내 몸에 자연스럽게 밴 것 같다. 밀가루 반죽 속에 팥소가 있고, 여러 가지 첨가물이 섞여 있다. 나는 그 빵을 먹으면서, 밀가루는 미국산, 팥은 국내산, 설탕은, 달걀은, 마가린은, 이스트는하면서 재료를 분석하지 않는다. “단팥빵은 역시 밀가루 맛이야, 아니 달걀 맛이군!” 하면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며 먹지 않는다. 모두 합쳐서 하나가 된 맛있는 단팥빵을 먹는다.

 

실제1) 복음 속에 또 다른 복음

 

성경 속에 또 다른 성경이 있을까? 복음 속에 또 다른 복음이 있을까? 복음 속에서 복음을 찾겠다는 것은 양파를 찾겠다고 양파 껍질을 계속 벗기는 것과 같다.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할 때 실체는 사라지거나 변질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따로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나무, 오솔길, 계곡, 봉우리 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큰 산과 같다. ‘예수님의 선재(先在), 성육신(成肉身), 죽음,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 재림(심판)’, 이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연속성을 지니는 실체인 예수님의 생애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다(3:16). 이 사랑이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이어 온 힘이다.

 

 

실제2)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복음서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이단 출몰과 박해 상황 속에서 지나친 재림 사상이나 부활 사상에 경도된 신앙을 바로 세워 준다. 물론 모든 사람은 영벌이나 영생의 부활을 한다(5:29). 아무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유달리 강조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이란 표현과 같이 요한복음은 무죄한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강조한다. 비록 다시 죽었을지라도 나사로가 살아났고(11:39~44),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살아났고(7:11~17), 다비다도 살아났고(9:36~42), 유두고도 살아났다(20:9~12).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이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죽지 않으셔야 할 무죄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지고 죽으신 대속(代贖)이다.

 

이 대속적인 죽음과 성육신, 부활, 승천, 재림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는 하나의 실체다. 그렇다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부활은 요한복음 구조에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을 비추어 주는 표적이다.

 

이에 유대인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2:18).

 

표적은 무엇인가? 표적은 그 자체보다는 무엇을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포도주 이적 사건을 비롯한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한다. 요한복음의 표적 일곱 개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향하면서 그 죽음의 의미를 알린다. 산이 정상인 산봉우리를 지향하듯이.

 

 

실제3)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2). 이 말씀은 부활만이 믿음의 근원이라거나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포도주 이적 사건에 뒤이어 성전(聖殿) 정화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목격할 때 성경 구절을 떠올렸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 또 관련 성경 말씀인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69:9)19절 말씀도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비로소 확실히 믿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실제4)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19:30).

 

요한복음은 십자가에서 성경을 응하게 하는 예수님의 목마름(19:28),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 피와 물(19:34) 등 다른 복음서보다도 십자가의 죽음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도 오직 요한복음만이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성취는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최종적으로 사명의 성취를 보증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성육신(成肉身)의 완성은 십자가의 죽음이다(1:14;19:30).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성육신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 심판의 주로 재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1:1~3;5:26~29;14:16;20:19~23).

김선배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위 글은 교회신문 <47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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