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95)] 사해 사본과 쿰란 공동체

등록날짜 [ 2018-01-17 11:11:51 ]

유대교 한 분파인 에세네파 쿰란 지역에서 공동체 이뤄
구약성경 연구 필사하며 종말 기다려
이 지역 사해사본은 성경 사본 역사 천 년이나 앞당긴 획기적 발견


윤석전 목사: 임박한 종말을 기다렸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자기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어길까 두려워 구약성경을 읽고 살았던 쿰란(Qumran) 공동체입니다. 쿰란으로 가 보겠습니다.

쿰란 지역에 가려고 여리고 남쪽으로 20km쯤 달리자 사해 북서쪽 해안 건조한 고원 지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땅에서 살았다는 쿰란 공동체는 어떤 단체일까? 이곳은 B.C. 167년부터 A.D. 70년까지 장차 다가올 종말을 기대하며 금욕생활을 한 에세네(Essenes)파 사람들의 거주지였다. 에세네파 1000여 명은 넓은 식당에서 돌로 이어진 긴 벽에 열을 맞춰 앉아 함께 식사했다. 그들은 공동 작업을 하여 거둔 대추야자, 꿀, 각종 결실물을 나눠 먹었다. 쿰란 공동체 사람은 공동 식사를 종말의 날에 하나님께 선택 받은 사람이 참여하는 잔치의 모형이라고 여겼다.

고고학자들은 쿰란 주변 가파른 절벽에서 이들이 사용한 수많은 동굴을 발견했다. 쿰란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도로 경건 훈련을 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 원본을 양피지에 베껴 썼다. A.D. 70년 유대 독립 전쟁(A.D. 66~73) 때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그 두루마리 성경 사본들을 동굴 곳곳에 숨겼다. 쿰란 공동체는 쿰란에서 종말을 맞으려는 소망을 이루지 못했지만 원본에 근접한 구약성경 사본을 남김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신실성을 입증하는 의로운 도구로 사용됐다.


<사진설명> [쿰란 공동체 주거지(B.C. 167~A.D. 70)] 점선은 쿰란 제4동굴. 쿰란 주거지에서 125m 떨어져 있다. 쿰란 동굴 가운데 가장 많은 사본이 발견돼 ‘쿰란 도서관’이라고 부른다.

<사진설명> [쿰란 공동체 주거지 평면도]  ①물길이 들어가는 곳   ② ③물 저장고   ④망대   ⑤공동체가 모이는 작은 방   ⑥필사하는 방   ⑦부엌   ⑧공동체 식사하는 방   ⑨그릇 만드는 곳   ⑩두루마리 보관용 항아리 만드는 곳   ⑪칸막이 방   ⑫타작마당
(오른쪽) [쿰란 지도] 쿰란은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사해(死海) 면에 있다.

(오른쪽) [정결례 장소] 성경을 필사하다가 ‘하나님’이란 글자가 나오면 모든 작업을 멈추고 필사하는 곳 옆에 있는 정결례 장소에 가서 물에 몸을 완전히 담갔다가 나오는 예식을 거행했다. 성경 필사를 하던 필경사들의 마음 자세를 짐작게 한다.


윤석전 목사: 쿰란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여리고에서 20km 떨어진 사해 면에 있습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주변에 샘도 거의 없는 황무지입니다. 그런 곳에서 산 이유는 쿰란 공동체가 세상을 등지고 임박한 종말을 대망했기 때문입니다.

윤석전 목사: 쿰란에 살던 사람들이 생활한 구체적인 흔적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왕대일 교수: 고고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자급자족 사회였다고 합니다. 토기를 굽던 가마, 사본을 복사한 교실, 부엌, 회의실, 함께 예배드린 강당이 발견됐습니다. 쿰란 공동체 주변에서는 농장 흔적과 공동묘지 터도 발견됐습니다. 이런 사실이 자급자족 사회였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됩니다.

윤석전 목사: 쿰란 거주자들은 어떤 이들인가요?

오택현 교수: 유대교 분파인 에세네파 사람들이라고 추측합니다. B.C. 164년에 마카비 혁명을 승리로 이끈 후에 대제사장이 된 마카비와 그 일가에 반발한 에세네파 사람들이 쿰란에 와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다고 봅니다. 이들은 성경을 마카비 일가와 달리 가르쳤는데 스스로 ‘새 언약의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침례 요한도 에세네파 사람이라고 봅니다.

윤석전 목사: 쿰란 공동체가 사용한 ‘새 언약’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왕대일 교수: 쿰란 공동체가 말하는 ‘새 언약’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들이 말하는 새 언약은 과거 시내산의 율법적 계약을 갱신(更新)하는, 속죄의 약속으로 맺은 언약을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살지 않은 과거 이스라엘과 달리, 자기들이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메시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룩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 ‘새 이스라엘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새 언약의 백성인 쿰란 공동체는 쿰란에서 어떤 생활을 했나요?

왕대일 교수: 생활 모습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비슷합니다. 자급자족할 뿐 아니라 공동으로 재산을 모아 사용했습니다. 사해사본 중 하나인 공동체 규칙서가 있는데 공동체 생활과 구성원 관계 등 지침을 잘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당시 회계담당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나 필로 유데우스(Philo Judaeus, B.C. 20~A.D. 50) 같은 사람들은 “에세네파 사람들은 독신주의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발굴 현장에서 어린아이와 여자의 뼈도 나왔습니다. 독신을 고집한 사람만 있던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윤석전 목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성경 기록 사본이 쿰란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사해 북서쪽 해변에서 1km 떨어진 건조한 고원에 쿰란 유적이 있다. 성경을 베끼던 필사실은 원래 2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1층 바닥에서 잉크병과 책상이 발견됐다. 필경사(筆耕士)들은 이곳에 앉아 성경 본문을 옮겨 적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거부한 대신, 성경 필사에 전력했다. 쿰란 지역에 세운 기념관에 당시 만들어진 구약성경 사본 모형이 전시돼 있다. 사해사본은 B.C. 2세기에서 A.D. 1세기에 만들어졌는데 고대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스어로 기록돼 있다. 필경사들은 각 언어로 구약성경 본문, 외경, 주석서, 공동체 지침서를 적었다. 펜을 이용해서 양피지(羊皮紙)나 파피루스(Papyrus)에 기록한 사해 문서들은 구약성경 사본의 역사를 천 년이나 앞당겼다. 이 사본들은 각종 긴 항아리에 담겨 보관됐다고 한다. 또 매일 사용했다는 정결 예식 장소에서는 문서 작업을 하던 필경사들의 마음 자세를 짐작케 한다. 그들의 작품이 2000년의 침묵을 뚫고 나와 성경의 신실성을 밝히고 있다.

<사진설명> [성경 필사실] 필사실은 2층 건물이며 1층 바닥에서 잉크병과 책상을 발견했다. 필경사들은 이곳에서 성경 본문을 히브리어, 아랍어 등 각종 언어로 옮겨 적었다.

<사진설명> [B.C. 2세기에서 A.D. 1세기에 양피지에 기록된 사해사본] 각종 긴 항아리에 담겨 쿰란 주변 동굴 열한 곳에서 발견됐다.

윤석전 목사: 쿰란 사본이 발견된 과정을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사해사본은 성경 사본의 역사를 천 년이나 앞당긴 획기적인 발견입니다. 이전까지 주로 보던 사본은 A.D. 1008년에 만들어진 레닌그라드 구약사본(leningrad codex)입니다. 사해사본은 B.C. 2세기부터 A.D. 70년까지 쓰여진 사본이라 어마어마한 발견입니다. 베두인(Bedouin) 양치기 한 명이 우연히 찾아내서 더 놀랍습니다. 1947년경 쿰란 지역은 양 치는 베두인들만 다니는 인적 드문 곳이었습니다. 양치기 한 명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이곳저곳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동굴을 발견해 재미 삼아 돌을 던졌는데 안에서 질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호기심에 들어가 봤더니 질그릇, 항아리, 양피지를 말린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양치기는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 채 베들레헴에 가서 아랍인 고고학자에게 팝니다. 그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채고 유대인 고고학자 E.L. 수케닉(1889~1953)에게 팝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독립하지 않은 상황이라 베들레헴에 가는 일은 목숨을 거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본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안 수케닉은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에 들어가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사해사본을 구입합니다. 그렇게 사해사본 일부가 빛을 보게 됐습니다.

윤석전 목사: 쿰란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모두 성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나요?

왕대일 교수: 쿰란에서 발견된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 사본입니다. 에스더서를 제외한 전 구약성경의 사본이 나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다양한 문서가 함께 발견됐습니다. 공동체 조직과 질서를 어떻게 꾸렸는지 알려 주는 ‘공동체 규칙서’ 자료들이 나왔습니다. 둘째는 종말을 대망했기에 성경 사본만 복사한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자기 시대에 맞춰 쓴 성경이 따로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다시 쓴 성서’라고 말하는데 ‘다메섹 문서’ 같은 책입니다. 시대 배경은 B.C. 1세기, A.D. 1세기로 유대인들이 묵시문학적인 글을 많이 쓴 시기라 박해를 피해 피난한 사람들이 종말의 때를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한 책을 많이 썼습니다. 현재 기독교는 그것들을 외경(外經)이나 위경(僞經)으로 간주하지만 그곳에서 외경이나 위경에 해당되는 문서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쿰란 공동체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이라 할 정도로 사본이 많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쿰란 공동체가 사본을 동굴에 숨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택현 교수: A.D. 66년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을 때 로마에 저항하던 열심당원(Zealot)은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쿰란을 지나 마사다로 숨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이 남아 있으면 저항의 불씨가 살아 있는 것이라 여겨 쿰란 공동체를 멸절시키려고 쳐들어갑니다. 그래서 쿰란 공동체는 성경 사본들을 질그릇에 담아 은신하던 동굴에 숨깁니다. 훗날 돌아와 이 사본을 읽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몸을 피했는데 쿰란 공동체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2000년이 지나 사본이 발견됐습니다.

윤석전 목사: 양피지에 적힌 성경 사본이 어떻게 2000 년간 보존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오택현 교수: 이 지역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온도가 높고 건조한 편이어서 2천 년간 사본이 변형되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져 온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여러 사본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왕대일 교수: 사해사본을 필사할 때 주석(註釋)이나 관주(貫珠)같이 오른쪽 여백에 깨달은 말씀의 뜻을 적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견된 사본이 성경 사본 역사를 천 년 앞당겼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는 히브리어 원어 성경은 A.D. 1세기경에 유대 사회가 경전으로 확정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100년, 200년 앞선 시대에 쿰란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들과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이 같아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와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고고학으로 볼 때 필기(筆記) 문화도 알 수 있습니다. 얇게 무두질한 가죽을 서로 연결해서 종이 대용으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검은색 특수 잉크와 촉을 사용해 쿰란 히브리어로 썼는데 현대 히브리어와는 모양이 조금 다릅니다. 어떤 히브리어를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쿰란 공동체가 쓴 성경 사본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 경전에 관심 있는 사람, 고고학자 등에게 대단한 가치를 지닙니다.

윤석전 목사: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은 아무도 모르게 감춰진 비밀이었지만 하나님은 섭리를 나타내시어 우리가 보는 성경이 정경(正經)임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알려 주셨습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6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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