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의 평신도신학<31>] 창조 섭리는 시간의 순서보다 논리성에 근거해야
창세기에 대하여 ⑤-문학적 구조 견해

등록날짜 [ 2011-09-21 11:08:31 ]

창세기를 과학이나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창조했느냐가 중요해

앞서 살펴본 ‘어린 지구 이론’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난 문자적 이해에 맞춰 현대과학을 이해하며, ‘오랜 지구 이론’은 창세기 1장을 현대과학 이론에 맞춰 이해하고, ‘재창조 이론’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특별한 기간을 집어넣어 이론을 정립하려 한다.

이 세 가지 견해는 창세기 1장에 사용한 다양한 단어나 어구(예: ‘날(day)’, 또는 ‘혼돈하고 공허한’)의 의미를 논한다. 어느 한 의견도 창세기 1장에서 다루는 문학 종류에 관해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린 지구 견해, 오랜 지구 견해, 재창조 견해는 비록 모두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창세기 저자가 어떻게 창조가 일어났는지에 관한 문자적 연대기 정보만을 독자에게 제공한다고 가정한다.

이에 반해, 문학적 구조 견해(The Literary Framework View)는 성경 저자들이 흥미 있어 하는 것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칠일 동안의 창조를 둘러싼 이야기는 창조 순서에 관한 과학적 호기심을 만족하게 하는 데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창조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하나님께서 혼돈에서 질서를 가져와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히브리인들의 고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적 구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연대기적 정리가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 속 흥미 있는 주제라는 설명이다.

문학적 구조 견해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용어들과 그 용어들이 지닌 의미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창세기 1장 전체적인 구조를 본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창세기 1장 주제에 관련한 구조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첫 절은 일반적인 소개 문장의 역할을 한다. 둘째 절은 나머지 이야기들이 풀어나가야 할 문제를 언급한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해, 지구는 ‘어두움’에 쌓여 있고 ‘깊음’에 덮여 있으며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러한 각각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고 또 이러한 무질서에서 질서를 세우시는 데 어떻게 성공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창조 주간은 삼 일씩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첫 날부터 셋째 날 그리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 세 날씩 구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가 있을찌어다”라는 구절로 네 가지 창조를 이루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둘째 세 날의 창조는 처음 세 날의 창조와 거울 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즉 넷째 날은 첫 날과 거울 구조를, 다섯째 날은 둘째 날과 거울 구조를, 여섯째 날은 셋째 날과 거울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처음 세 날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드러낸 ‘어두움’과 ‘깊음’과 지구의 ‘혼돈’한 문제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하나님은 창조한 것들이 존재할 공간들을 창조하심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관여하셨다. 둘째 세 날 동안은 창세기 1장 2절의 ‘공허한’ 문제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들을 처음 세 날 동안 창조하신 공간들을 채우실 것들을 창조하심으로 해결하셨다.

첫날에 하나님은 (어두움에 관계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빛을 창조하시고 어두움에서 빛을 분리하셨다(1:3~5). 둘째 날에 하나님은 (깊음에 관계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궁창을 창조하시고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분리하셨다(1:6~8). 셋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혼돈한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물에서 땅을 분리하시고 마른 땅과 식물을 창조하셨다. 이렇게 셋째 날까지 어두움, 물, 그리고 혼돈함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언급하였다. 다음 세 날 동안은 마지막 문제인 공허함(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간들을 채워야 할 것들을 창조하심)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것이 바로 처음 세 날이 나중 세 날과 거울 구조를 이루는 방법이다. 넷째 날에 첫날 창조하신 공간을 채우신다. 다섯째 날에는 둘째 날 창조하신 공간을 채우신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셋째 날 창조하신 공간을 채우신다.

자세히 말하자면, 넷째 날 하나님은 빛들을 창조하셔서 그가 첫날 창조하신 하늘을 채우셨다(1:14~19). 다섯째 날 하나님은 물고기와 새를 창조하셔서 둘째 날 창조하신 물과 하늘을 채우셨다(1:20~31). 여섯째 날에는 하나님은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셔서 셋째 날 창조하신 마른 땅에 채우셨다(1:24~31).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이 모든 일에서 안식하시고 그가 지은 창조물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2:1~4).

그러므로 우리는 날들의 연속성은 연대기적 연속성이 아니라 논리적, 주제적, 문학적인 연속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이해가 현대의 역사적인 인식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이상할지라도 성경 저자들은 종종 역사적인 사실적 표현법보다 주제적인 일관성을 더 강조했다. 복음서를 보더라도 예수의 말씀과 행동들을 역사적인 시간순서보다는 주제에 따라 모아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복음서마다 사건 순서가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일어난 일들의 순서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문학적 견해에서 창세기는 시간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해준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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