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대 칸/타/타
부활의 감격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등록날짜 [ 2004-04-28 09:17:20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천지가 창조된 이래 가장 크고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짧은 일주일의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환영, 그리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또 극적인 부활로 이어지는 긴박하고도 숨 막히는 반전의 역사는 이 세상의 어떤 방법과 예술적인 표현으로도 그 위대함을 표현하기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10년 만에 칸타타를 준비하는 우리 성가대원들, 실장님 이하 임원진들의 간절한 소망 하나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간에 부활의 소식을 다시 한번 그때의 그 일처럼 현장감 있게 외쳐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동일한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 수많은 선배 사도들이 피 흘리며 순교하였듯이....

그 전에 우리는 한 가지 우리 속에 은근히 잠재되어 있는 하나의 잘못된 사고를 정리하여야 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위해 또는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지만 십자가는 바로 ‘나’를 위하여 그 채찍은 ‘나 자신의 질병과 저주’를 위하여 당하셨다는 분명한 사실의 재정립이 필요했다. 칸타타를 부르는 우리나 듣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다시 한번 상기 할 때 우리 주님의 부활은 더욱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방금 전, 바로 방금 전에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바로 나 자신은 몇 날이 못되어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며 난동을 부리는 폭도의 모습으로 변했고,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채찍질하는 주인공으로, 또 벌벌 떨고 있는 비겁자의 모습들로 변한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어떠한 작은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너무 쉽게 팔아버리고 고난 가운데로 내어주고 있지 않은가.

부활의 전제조건은 절대적으로 죽음이 되어야하기에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여야 했다. 요즈음의 우리는 너무나 따뜻한 아파트 같은 곳에서 봄을 맞이하기 때문에 봄에 피어나는 새싹에 대한 감동이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그러나 만일 극도의 추위와 굶주림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다면 어느 날 봄바람에 다가서는 목련과 개나리에 마음이 활짝 핀 듯한 감동이 꿈틀거릴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십자가까지의 약 12시간의 그 잔인하고 처절한 고난의 사건은 바로 우리 인류가, 나 자신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받아야할 가장 저주스러운 형벌이었다. 그것은 바로 믿었던 세상으로부터 누구나가 받아야 할 철저한 배신과 모욕이었기에 그 모든 것을 책임 지신 어린양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처절하고 잔인하였으리라.

짓밟힌 장미꽃처럼 처참하게 찢어져 버려지신 주님,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시신이라도 보려 무덤으로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의 귀에 갑자기 들려진 첫 번째 소식! 그것이 바로 첫 열매가 되신 우리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었다. 인류를 위해, 아니 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기에 부활은 더 충격적이어야 했다. 더 폭발적이어야 했다. 그를 얘기할 때에는 좀더 우리 입에서 침이 튀어야하고 더 절제할 수 없는 감격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극적인 표현력을 동원하여 찬양으로 고백하고 싶었다. 성가대원의 절반 이상이 릴레이 금식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일주일에 5번이나 되는 연습에 불평 없이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승리의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그것이었다.

어떻게 감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늘 울어도 눈물로도 못 갚을 그 사랑을. 우리의 잠시 잠깐의 감동된 찬양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부활하심의 웅장함과 놀라움도, 그 경이로움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현력과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며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령이시여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시어 거짓 찬양 거짓 눈물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표현할 수 있는 절정의 감동을 주소서!”

연습 중간에도 우리는 많이 울었다. 몇 번은 연습 도중 곡을 끊으려다가 눈물을 흘리며 진지하게 연습하는 단원들에 압도되어 끝까지 불러야만 했다. 우리들은 항상 지쳐있는 시간들이 많았지만 더 좋은 표현으로 더 좋은 찬양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싶었다. 우리는 우리의 찬양을 듣고 먼저 우리 주님이 한없이 기뻐하시기를 소원했고, 다음에는 단 한 사람의 불신자라도 주님의 부활을 이해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예루살렘에서의 폭발적인 환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과 갈보리의 십자가, 부활의 환희와 기쁨, 그리고 부활을 경험한 모든 이들이 증인이 되어 땅끝까지 이르며 종국에는 예수 이름만이 이 세상을 가득 메우며 왕의 왕 되심을 선포하고 찬양하는 피날레로 끝을 계획했다. 특히 마지막으로 ‘예수 예수 예수’ 라는 곡에 있어서는 모든 악기와 모든 대원, 그리고 함께한 모든 이들이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며 바로 그 부활의 승리가 우리의 것으로 되기를 소망했다.

칸타타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가 쉬이 사라져 버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우리들의 작은 찬양의 고백들이 씨앗이 되어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또 삶의 현장 가운데서, 매일 생명력 있게 살아나기를. 그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증거 하는 기쁨과 감격 속에 우리에게 맡겨진 대성전 건축과 세계선교, 그리고 영혼구령의 절제 되지 않는 사명 가운데서 감사와 찬양함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우리 찬양 가운데 임하신 주님!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5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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