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 찢고 나와 죽음이 별게 아니라고 외치다
뮤지컬 ‘그 날’

등록날짜 [ 2023-02-01 10:00:28 ]

<사진설명> 뮤지컬 ‘그 날’ 중 주요 출연진들이 ‘마지막 때에는’ 곡을 찬양하며 “죽기까지 순종하며 죽기까지 사모하며 그 날에 영광을 보리라”고 다짐하고 있다.



지난 1월 22일(주일) 오후 예루살렘성전에서 우리 교회 문화복음선교국 주관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린 뮤지컬 ‘그 날’은 가까운 미래가 배경이며, 종교통합운동으로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으면서 ‘예수를 부인하라’는 회유와 혹독한 고문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정 목사와 신앙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그 날’은 마태복음 24장을 무대에 그대로 옮겨 오고자 여러 차례 각색을 거쳐 작품 완성도를 높였다. 김병제 목사의 뮤지컬 관람 소감을 실어 성도들과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많은 사람이 담임목사에게 다시 한번 더 젊음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저렇게 해 볼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라도 나는 충분히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더는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많은 사람이 ‘한 몇 년이라도 더 젊어질 수 있다면, 아니 몇 달이라도 내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꿈에라도 전혀 그런 생각을 한 치도 해 보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나는 한시 바삐 이생의 죽음을 건너가서 주님 곁으로 가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기다릴 뿐입니다. 이 땅의 ‘마지막 시간’은 우리 주님을 만나는 ‘처음 시간’일 것입니다. 나는 그 시간을 쉬지 않고 기다리고 있습니다.”(윤석전 목사님 설교 중에서)


최후의 모습 직설적으로 그린 ‘그 날’

뮤지컬 ‘그 날’은 요한계시록의 한 장면을 그대로 무대 위에 올려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이 참혹하게 떼죽음을 당하는 공포를 그립니다. 성도들은 죽음의 상황에서도 죽음을 한낱 무슨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가볍게 여기고 죽음으로 그냥 걸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와 달리 그렇게 잔인한 죽음을 바라보면서 무대 아래의 성도들은 옅은 한숨을 자아내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립니다. 그리고 무대와 성도들 사이의 벽은 깨지고 이제 무대 위의 환란과 고통이 무대 아래의 환란의 아픔으로 고스란히 그대로 전이됩니다.


배우들이 보여 주는 무대 현실은 관객들과 별개의 세계입니다. 관객들은 무대를 바라보면서 전혀 다른 일상을 보고 경험합니다. 무대 위에서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 넘어진다 해도 그건 무대 위의 흘러가는 스토리일 뿐, 관객들은 그저 바라보면서 딴 세계의 일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무대와 관객 사이는 이른바 눈에 보이지 않는 ‘제4의 벽’이 가로막혀 있기에 서로 말을 주고받지 못합니다. 관객은 그저 입을 다물고 무대를 바라보기만 할 뿐입니다. 관객은 무대 위의 세계를 향해 말을 걸거나 끼어들지 못합니다. 그게 연극이 갈라놓는 두 세계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무대의 스토리는 관객들에게 대체로 비밀스러운 코드를 은밀하게 깔아 놓고 말을 건넵니다. 높은 예술성은 관객들에게 노골적으로 말을 걸지 않습니다. 이른바 예술 무대는 관객들에게 간접적으로, 또는 알아챌 듯 알아채지 못할 듯 속삭이듯이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뮤지컬 ‘그 날’은 그런 세속의 높은 예술성을 일찌감치 건너뛰고 노골적으로 크나큰 음성과 노래로 무대 아래에 있는 관객들에게 직설적으로 그들이 할 말을 전합니다. ‘그 날’은 관객을 향하여 귀를 간질이듯이 속살거리지 않고 시원스럽게 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제 성도들이 되어서 ‘그 날’이 말하는 메시지를 단박에 알아듣고 무대 위의 고통에 함께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드라마의 본래 목적은 관객의 카타르시스(淨化)입니다. 높은 자들의 추락을 현실과 다른 드라마로 보면서 묘한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드라마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식으로 그러한 기승전결을 꾸며 냅니다. 변학도는 추락하고, 춘향은 한양으로 가서 정부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날’을 관람한 성도들은 무대 위에서 당하는 고통과 아픔으로 오히려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고 마음이 맑아집니다.


무대 위의 배우는 이제 더는 배우가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그들은 고통 중의 아픔을 흉내 내지 않습니다. 아픔을 있는 그대로 몸으로 견딥니다. 밧줄에 묶여서 마치 십자가 형상을 그려 내는 주인공 정 목사의 모습은 그냥 그대로 고통과 아픔입니다. 그를 밧줄에서 풀어내려 질질 끌어서 내동댕이칠 때 그 형제는 그 아픔을 그대로 현실화합니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 화면에 고스란히 보일 때, 이제 무대 아래의 성도들은 눈물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묻다

뮤지컬 ‘그 날’은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도처에서 끈질기게 묻습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그게 당신 인생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태 주었고 무슨 도움을 주었는가?” 이 물음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 신앙 없는 자들에게 늘 시달리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디서 밥이 나오느냐 떡이 나오느냐?” 하는 힐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효용 가치는 무엇입니까?


오래전 1983년 2월 25일에 북한 공군 장교 이웅평 대위는 미그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남한의 민주주의를 경험하기 위해 새문안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런 예배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냥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닙니까?” 공산주의 유물론자다운 말입니다.


그들 눈에 교회의 예배는 쓸데없는 짓입니다. 신앙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시선에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 뿐, 밥도 떡도 나오지 않는 그냥 무용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비신앙인에게는 늘 수수께끼입니다. 더구나 신앙을 빙자하여 죽음을 불사하기도 하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무대뽀’들입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아까운 목숨을 신앙 때문에 버린다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안타깝기 그지없는 바보들의 행진일 뿐입니다.


극 중 자주 나오는 “회개하라” 하는 외침은 신앙의 처음 출발이기도 합니다. 본래 이 말은 “메타노이아(Metanoia)”로서 “마음의 흐름을 바꾸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온 힘과 전심을 다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꾼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향을 뒤바꾸려면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의 방향을 반대로 바꾸려면 지금까지 달려온 속도만큼 온 힘을 다해서 180도 방향으로 바꾸어야 그게 가능합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향과 180도 다른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죽음 앞에서, 특히 그런 반대 방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인다고 하면 도리 없이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신앙을 가진 자들은 어느덧 죽음은 별게 아니라고 말하거나, 죽는 것을 그냥 한번 지나가면 되는 길이라고 믿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예수 믿고 구원받은 영적인 신앙은 실상 아무도 못 말립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누가 어떻게 해 보겠습니까? 죽인다고 을러대면 두려워서 움츠러들고 항복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그래, 죽이려면 죽여라!” 하면서 오히려 저항하는데 무슨 수가 있습니까? 죽음은 협박하는 자들이 마지막에 사용하는 최고 최후의 무기입니다. 그래서 극 중 고문장이 “그냥 헛된 시늉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해라. 그러면 그냥 지나갈 수 있다”라고 해도 “그냥, 빨리 죽여라!” 하면서 죽는 것을 무슨 시장 바닥의 흥정과 같이 여깁니다. 예수 믿고 자기 영혼이 확실하게 천국 갈 신앙을 가진 자들은 천하가 다 덤벼도 이기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협박이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 더는 써 볼 무기가 없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길목일 뿐인 ‘죽음’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경이로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답고 동화 같은 이야기가 사방 널리 퍼져있는 장소입니까? 생명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로 들어와서 주인공인 양 기쁨과 아픔을 교차해 가면서 골짜기와 봉우리를 거칩니다. 우리의 생은 참으로 놀라운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은 끝장을 내듯이 종말을 고하는 듯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어떤 장례식장에서도 죽은 이들과 이별하는 사람들이 “이제 모든 게 끝났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형식이든, 호흡을 그친 배우자를 향해 “여보! 우리 다시 만나요”라면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자들은 더욱더 분명하게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라고 큰 소리로 항변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앙은 ‘한 번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죽음을 건너서서 다시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고 확신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죽음의 스올(지옥)은 음침한 그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어두운 그림자 같은 죽음을 향해서 욥은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라고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 믿고 천국 갈 확실한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서 인간의 육체의 죽음은 힘을 잃은 권력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첫 번째 예수 부활 이후 우리는 예수 부활을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 가는 자들입니다. ‘한 번 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나면 한 번 죽는다’고 합니다. 한 번 태어난 자들이 그들의 거듭난 예수 생명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살아갈 때, 그들 신앙인은 죽음 건너편에서 또 다른 경이로운 생명으로 우리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이어 갑니다.


영원의 때를 살아갈 신앙인에게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일이 어린아이들이 바닷가 해변에서 짤랑거리면서 물장난하거나 모래성을 쌓는 것에 불과합니다.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치면 지금까지 놀면서 쌓아 놓은 모래성을 부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살아남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쨌든 죽지 않고 목숨만 살아남아라. 그게 결국 이기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게 최고의 승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거짓말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죽음을 넘을 것인가, 이게 신앙의 가치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확실한 천국의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죽음’은 길을 가다가 고개를 하나 더 넘는 것처럼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고개 너머 또 다른 영원히 사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죽이신 사건입니다. 이제 죽음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주님 곁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죄 아래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었습니다. 더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차라리 죽음으로 들어가서 빨리 주님과 함께 하고 싶은 욕망이 훨씬 더 좋다고 합니다(빌1:23~24). 그 좋은 죽음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형제들이 눈에 걸립니다. 그래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김병제 목사(협동목사)

목회학 박사 / 미국 서든 침례신학교



위 글은 교회신문 <78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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