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읽는 시편 (2)] 죄는 멈추지 않는다

등록날짜 [ 2025-12-30 10:25:02 ]


죄를 좇고 죄의 길에 서 있다가

죄의 자리에 눌러앉아 결국 멸망

그러나 예수가 흘린 속죄의 피가

죄의 질주를 멈추고 의로 돌이켜


처음엔 그냥 스친다. “악인의 꾀를 좇는다”(시1:1). 걷는다는 뜻이다. 방향을 틀 수 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그러나 곧 선다.” 죄인의 길에 발을 멈춘다. 걷던 자가 서 버렸다. 구경하던 자가 참여자가 된다. 슬쩍 발을 담갔을 뿐인데, 이미 죄의 깊은 수렁에 빠져 돌이키기 어려워진다.


“끝은 앉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원어로는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잠깐 앉은 게 아니다. 눌러앉았다. 죄가 집이 됐다. 악에 깊이 잠겨 버린 상태이다.


좇다. 서다. 앉다. 이것이 죄의 문법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다음에는 습관이 됐다. 끝에는 본성이 됐다. 악은 관성이 있다. 가속도가 붙는다. 스스로 멈출 브레이크가 없다.


시편 1편 1절이 그린 풍경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세 번이나 부정이 나온다. ‘아니하며’가 반복된다. 왜 세 번인가. 한 번으로 안 되기 때문이다. 죄는 그만큼 집요하다.


‘오만한 자’의 히브리어 ‘루츠(luts)’는 입을 삐죽거리며 조롱하는 모습이다. 누구를 조롱하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손가락질한다. 이것이 죄의 종착역이다.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는 것. 마귀의 속성이다.


우리는 본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성경은 말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우리는 본능적으로 악인의 꾀를 좇았다. 죄인의 길에 섰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했다.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었다. 죄의 관성은 우리를 지옥을 향해 질주하게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질주를 멈췄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만한 자가 받아야 할 심판을 그분이 대신 받으셨다. 우리가 앉아 있던 그 자리의 끝이 어디였는가. 저주의 나무 십자가였다. 참혹한 지옥이었다. 그분이 거기 달리셨다. 피를 흘리셨다. 그 피가 죄의 관성을 끊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마귀의 자리에 앉아 있던 자가 일으켜 세워졌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의인의 회중으로 옮겨졌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행위가 선해서도 아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 때문이다.


그러므로 섞이지 마라. 악인의 꾀가 아무리 번지르르해도 좇지 마라. 죄인의 길이 아무리 넓어도 서지 마라.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무리 안락해 보여도 앉지 마라. 그 끝은 파멸이다. 당신은 거기서 끌려나온 자이다. 십자가로 인해 생명수 시냇가로 옮겨 심긴 나무이다. 메마른 땅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창19:26).


죄는 멈추지 않는다. 악인의 꾀가 손짓할 때, 십자가를 보라. 내 대신 저주의 나무에 달리신 그분을 기억하라. 그 피가 죄의 질주를 멈춘다.


위 글은 교회신문 <93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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