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복음 전하여 영혼 구원 이뤄 내자!”
등록날짜 [ 2025-12-23 11:33:07 ]
인류 구원 위해 성탄한 예수
그를 만난 무신론자의 고백
“예수의 역사적 증거 앞에
나의 무신론이 녹아버렸다”
매해 성탄절이면 공원이나 대형 상점마다 장식된 화려한 불빛이 눈을 사로잡는다. 가족이나 지인과 선물도 주고받는다. ‘사람들은 무엇을 기념하는가.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가 왜 21세기 인류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가.’ 감상적 연말 분위기에 묻혀 버린 질문이다.
미국의 기독교작가인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붙잡은 사람이다. 그는 시카고 트리뷴 법률 담당 기자, 예일 법대 출신 그리고 자타공인 무신론자였다. 그에게 예수란 신화 속 인물에 불과했다.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이 붙들 이유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경악했다. 합리적이던 여자가 왜 비이성적인 종교에 빠졌는가. 그러나 아내에게서 이상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성품이 달라졌다.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확신에 찬 평안이 아내를 감쌌다. 스트로벨은 변화의 원인을 추적하기로 했다. ‘증거를 검토하겠다’, ‘허구라면 논파하겠다’는 기자 본능이 발동했다.
이후 2년간 그는 저명한 학자 13명을 인터뷰했다. 역사학, 고고학, 의학, 심리학, 신학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또 미국 전역을 횡단하며 증거를 수집했다. 목격자 증언, 기록상 증거, 확증적 증거, 반증, 정황 증거를 분류하고 검토했다.
결론은 의외였다. 스트로벨이 모은 증거가 모두 예수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는 고백했다. “무신론을 신봉하려면, 예수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비약이 필요하다.”
성경 속 예언에 새긴 사랑의 흔적
왜 우리는 이토록 끈질기게 예수의 실존을 따져 묻는가. 허구의 신이 실제의 죄를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화 속 영웅은 내 양심을 찌르는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한다. 인간에겐 전설로 덮을 수 없는, 스스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있다.
바로 죄이다.
현대인은 이 단어를 불편해한다. 구시대적 개념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양심은 안다. 우리 안에 어둠이 있다. 이기심, 시기, 교만, 분노, 탐욕. 아무리 교육받고 문명화되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이다. 선하게 살려 해도 실패한다.
성경은 죄를 창조주에 대한 반역으로 정의한다. 우주를 지으신 거룩한 분 앞에 피조물이 주먹을 흔든 것이다. 이 반역에는 대가가 따른다. 영원한 분리. 참혹한 형벌. 성경이 지옥이라 부르는 상태이다.
이 절망적인 영혼의 감옥은 종교적 수행으로도 탈출할 수 없다. 유대인 청년 루이스 래피데스도 같은 벽에 부딪혔다.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은 그는 유대교를 떠나 동양 철학을 탐구했다. 불교 모임에 참석하고, 일본 절을 순례하고, 힌두교를 공부했다. 업보를 지우려 금욕을 시도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방법이 없었다. 죄의 무게는 여전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구약 성경엔 이상한 기록이 있다. 죄 문제를 해결할 누군가가 온다는 예언이다. 이 예언들은 놀랍도록 구체적이다. 태어날 장소(베들레헴), 태어날 방식(처녀에게서), 배신당할 값(은 30냥), 죽는 방식(손발이 뚫림, 뼈는 꺾이지 않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48가지 이상의 예언이 수백 년 전에 기록되었다. 한 사람이 이 중 8개만 성취할 확률도 천문학적으로 희박하다. 우연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토록 치밀하게 예언을 남기셨는가. 사기꾼을 걸러 내려는 신원 조회가 아니다. 이것은 사랑의 흔적이다.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선지자의 입을 빌려, 집요하게 남긴 약속이다. “내가 반드시 간다. 너를 구하러 간다.”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오셔야만 했던 이유는 한 가지이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지옥으로 향하는 인류를 차마 두고 볼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래피데스는 구약을 읽다가 이사야 53장에서 멈췄다. 예수 탄생 700년 전에 기록된 문장들이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는 즉시 깨달았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이다. 어렸을 때 보았던 십자가상이 떠올랐다. 손발에 못 박힌 사람. 이제야 그 의미를 이해했다.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분. 『나니아 연대기』를 쓴 영국의 C. S. 루이스의 일갈처럼, 예수는 “미치광이거나, 지옥의 악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중간 지대는 없다.
멸망에서 영생으로…성탄의 의미
성탄은 시작이다. 완성은 십자가와 빈 무덤에서 이루어진다. 구유에 누인 아기는 자라서 십자가에 달려야 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거룩하신 분의 공의가 죄를 그냥 넘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값을 치러야 했다. 피 흘림 없이는 사죄가 없다(히9:22).
그래서 영원하신 분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다. 한계가 없는 분이 유한한 몸을 입으셨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살을 걸치셨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첫 울음을 터뜨린 아기, 그분이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이 경이로운 낮아지심의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지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그분이 온몸으로 받아 내셨고, 우리가 당해야 할 영원한 단절을 그분이 대신 감당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터져 나온 비명,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처절한 고통이었다. 오직 사랑하는 자녀를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건져 내기 위한, 아버지의 찢어지는 절규였다.
빈 무덤은 이 대속이 받아들여졌음을 증명한다. 사망이 그분을 붙들지 못했다. 죄의 삯인 죽음을 정복하셨다.
비겁하게 도망친 제자들도 순교자로 돌변했다. 무엇이 그들을 바꿨는가. 거짓말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를 보았고, 만졌고, 확신했기에 이후 성령 충만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신학자 제럴드 오콜린스의 단언이 정확하다. “부활 없는 기독교는 미완성이 아니다. 기독교 자체가 아니다.”
예언대로 오셨다. 예언대로 죽으셨다. 예언대로 부활하셨다. 역사가 증거한다.
‘History(역사)’라는 영단어에는 ‘His story(그분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이다.
<사진설명>『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著)
리 스트로벨은 결국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2년간 증거를 검토한 끝에 내린 평결이었다. 그는 세 단계를 거쳤다고 회고한다. “알다, 믿다, 되다.” 역사적 사실을 알았고, 의지로 신뢰했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몇 달 후 어린 딸 앨리슨이 다가와 말했다. “하나님이 아빠한테 하신 것처럼 나한테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아이는 학자를 인터뷰하지 않았다. 자료를 분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목격했다. 아버지의 변화. 세속적이고 화를 잘 내던 사람이 달라졌다. 아이의 눈에도 보일 만큼, 2000년 전 역사 속 예수가 오늘도 한 사람의 역사를 바꾸신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다.
성탄절이 다가온다. 캐럴 소리에 묻힌 본질을 다시 꺼내야 할 때이다. 베들레헴 구유에 누인 아기는 누구인가. 치밀한 예언을 뚫고 역사에 침투하신 하나님이다. 나의 참혹한 형벌을 대신 짊어지신 구원자이다. 성탄은 낭만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빚어낸 압도적 은혜이다.
그분은 오셨고,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 2000년 전의 그 사건이 오늘 당신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다. 관찰자로 머물 것인가. 증거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93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