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어느 죽음 앞에서 (下)

등록날짜 [ 2025-08-28 18:54:31 ]

반드시 다가올 죽음은 구체적 실제

믿는 자에게 죽음이란 참안식이니

두려워하거나 머뭇거릴 이유 없어


지난 호에서…은퇴 교수 중 가장 선배인 교수께서 소천하셨다는 부고 문자를 받은 후 내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다. 내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나를 긴장하게 했고, 이전에 인식하지 못하던 죽음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분 다음에 선배님 한 분이 계신데, 이제 내가 두 번째 나이 많은 교수인 것을 확인하며 바짝 다가온 내 죽음의 차례를 실감하는 찰나였다.


나는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별생각 없이 머나먼 날의 일처럼 여겼다. ‘죽음이 오면 오는 것이지 뭐!’라며 ‘예수를 구주로 믿으므로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냥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나날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음이 내 차례일 수 있다는 현실에 부딪치면서 내 죽음을 직시했다. 죽음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믿음으로만 안심하고 살던 내가, 그 실제를 눈앞에 마주한 것이다. 그래, 죽음은 현실이다.


죽음: 세대교체와 역사화 지점

죽음. 그건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고 있는 전환적 흐름이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1:4)라는 전도자의 귀띔처럼, 새로운 한 세대가 오기 때문에 앞 세대가 남겨놓고 갈 유산은 값지고 빛나는 것이다.


현재 80년을 넘긴 나의 지난날(과거)에만 젖어 있다면 아쉬움과 그리움만 남을 것이다. 그래서 아쉬움을 떨쳐 버리고 기다림으로 죽음을 맞을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아쉬움과 그리움은 과거에 대한 추억이며, 기다림은 미래를 향한 소망과 희망이다. 언제일지 모르는 내 죽음의 날을 향해 나는 기다림으로 태도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더 아름다운 것이고 얼마의 여생일지 모르나 미래를 향해 돌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기다려야 하나? 그것은 하나님도 우리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18).


죽음. 그건 내 일생을 역사화하고 평가하는 지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지극히 작은 것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다시금 마음을 다져 본다. 


죽음의 빈소에 걸린 영정사진 한 장에는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이 응축(凝縮)되어 있다. 그 사람의 지나간 역사가 묻어나는 신비한 색깔을 내뿜는다.


봄과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피고, 가을이 지나간 자리에 크고 풍성한 열매가 남듯이, 역사가 지나간 자리에는 수많은 인물의 영적·정신적·물질적 유산이 남는다. 유익한 흔적을 남긴 분은 존경의 대상으로, 별로 한 일이 없는 이는 잊힐 인간으로, 기분 나쁜 흔적을 남긴 자는 냉소의 기억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지나간 자취가 그 사람을 심판하고 자랑하기도 한다. 인물이 지나간 자리가 바로 역사라면, 사람 각자가 죽는 순간까지 자기 삶을 역사화하는 시간들이다. 또 죽음의 빈소는 문상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죽은 이의 뒤안길을 역사화하는 작업의 시작점이 된다.


일생의 역사가 사진 한 장 속에서 투사되어 그가 어떤 신앙의 길을 걸었는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가 빈소를 찾아 영정사진을 쳐다보고 고개를 숙이는 모든 이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비밀리에 판독되어 스며든다.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며

죽음. 그건 벅차게 살아온 우리 인생이 ‘쉼’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한결 수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부족하지만 나도 무척 바쁘게 그리고 힘겹게 인생길을 달려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성경은 인간을 ‘쉼’이 필요한 존재로 보고 있다. 하나님도 창조라는 엄청난 일을 마치신 후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라며 안식하셨다. 그 ‘쉼’이 인간에게도 필요하다고 보셔서 그날을 안식일로 정하여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정년퇴임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얼마 후에 있을 죽음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행복할 것 같다. ‘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거룩한 순례의 마지막 화면(畫面)이다. 인간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은퇴나 죽음이라는 말이 나쁜 것만이 아니며, 내 인생의 또 다른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쉼’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된다.


‘쉼’은 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창조주는 자연의 원리에 ‘쉼’의 중요성을 깊이 심어 두셨다. (일하는) 낮과 (쉬는) 밤을 창조하시고, 7일마다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7년마다 안식년을 만드시어 땅과 짐승까지도 쉬게 하셨고, 50년마다 희년을 주셔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큰 법칙이다. 그래서 죽음도 그러한 ‘쉼’의 원리로 받아들이며, 흔쾌히, 미련 없이, 의젓하게, 당당하게, 죽음의 문턱을 가볍게 넘어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신앙의 순례자는 이동도 정착도 절대시하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달려가고 싶다. 하나님의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살아가려 한다.


또 “하루 해가 이미 저물었으되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고, 한 해가 점차 저물어 가되 등자나무와 귤나무는 새로이 꽃다운 향기를 풍기나니, 군자는 만년에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 분발할찌어다”라는 채근담의 글귀처럼, 가까운 죽음 앞에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유지하도록 정진(精進)하기로 했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 법이고 무화과나무는 새로운 잎새에서 또 다른 열매를 맺는다”라고 한다. 여든이 넘어가는 길목에서 새로운 잎새가 되어 어느 곳에서건 또 다른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끝자락이 보이는 때까지 열심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죽음, 영원한 영광의 문

언젠가 나의 영정사진을 마주한 자녀들이 이렇게 말해 주길 바란다. “우리 아빠는 정말 신실하셨고, 열심히 살아오셨고, 참 아름답게 떠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국의 주님께서 내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수고했다”(마25:21) 하며 반겨 주시는 그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나는 기도하고, 충성하고,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살아가고자 한다. 노력과 수고의 길을 차분하게 걷고 싶은 것이다.


나의 죽음이 갖는 형태와 의미가 살포시 의미 있는 죽음의 존재감으로 위문객들의 지근거리로 근접하도록 나도 본분을 다하고 싶다. 마치 우리가 애써 외면하던 죽음을 이제는 일상에서 성찰해야 한다고 소리 없이 웅변하는 나의 죽음이 되면 오죽 좋겠는가.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생명을 노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기 때문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문이기에!

우리가 애써 외면하던 죽음을 이제는 일상에서 조명해야 한다고 소리 없이 웅변하는 나의 죽음에 대한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종진 목사

前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前 한국기독교학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91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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