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교구, 13~18교구 연합예배] 성령 충만하여 영적생활 승리하라!
등록날짜 [ 2026-08-05 14:48:19 ]
많은 이의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
나만 우선해 주변에 무관심 하면
서운함 남은 형식적 사이로 악화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서로 돌아보아 주를 기쁘게 하길
잔치가 벌어졌다. 집 안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린다. 밭에서 돌아온 큰아들이 문 앞에 멈춰 서서 종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냐. 동생이 살아 돌아와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답이 돌아온다. 큰아들은 노하여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눅15:28).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다. 큰아들이 답한다. “제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여러 해 쌓인 서운함이 터져 나온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그의 입에서 ‘내 동생’이 아니라 ‘이 아들’이 나온다. 남의 이름이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1~32).
아버지는 야단치는 대신 “얘”라고 부드럽게 부르며 달래고, 큰아들이 ‘이 아들’이라 밀어낸 그 사람을 ‘이 네 동생’이라 고쳐 부른다. 끊어진 이름을 아버지가 다시 잇는다.
여러 해 충성한 아들, 믿음의 사람이다. 그 마음에는 알아주지 않은 서운함만 남았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 감정이 마음을 가득 채우면 곁의 생명도 보이지 않는다. 잔치 안은 기쁨이었고 문밖은 서운함뿐이었다.
어제까지 잘 지내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차갑다. 이유를 물어도 답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면 자기 감정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서운함 때문이다. 무시로, 침묵으로, 연락 두절로 마음 문을 닫는다. 교회 안이라고 다를까. 주님은 마지막 때의 징조로 이것을 꼽으셨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사랑은 예고된 대로 식어 가는 중이고, 큰아들은 지금도 우리 안에 남아 있다.
250년 전의 진단서…공감의 결핍
1759년, 애덤 스미스가 이 병을 짚었다. 『도덕감정론』의 사고실험 하나. 내일 새끼손가락을 잘라야 하는 사람은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반면 이웃 1억 명이 재난을 당했다는 소식에는 어떤가. 직접 보지만 않는다면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코를 골면서 잘 것”이다. 내 새끼손가락이 남의 파멸보다 무거운 게 인간이다.
스미스는 자기만 아는 사람을 이렇게 그린다. “철석같이 단단하고 냉혹한 심장을 가져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감각하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불쾌한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250년 전 문장인데 어제 만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혹시 거울 속 내 얼굴은 아니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려면 자애(自愛)의 오만함을 꺾고, 이를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내가 소중한 만큼 상대도 소중하다는 자리까지 나를 낮추라는 말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내게 공감해 준다. 낮추지 못하면 공감을 잃고, 공감을 잃으면 곁을 잃는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어느 법학자는 스미스가 말한 ‘공감’이야말로 아주 성경적인 감정이라고 강의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양심을 심어 주셨고, 그 양심이 움직일 때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고 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오래 남는다. 우리는 누구나 공감해 주길 바라고 말하지, 무시당하길 바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내가 그렇다면 상대도 그렇다. 공감은 성품 좋은 사람의 특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신 기본 장비이다. 쓰지 않으면 녹슨다.
정신을 빼놓는 사람
자기 감정만 소중한 사람에게는 이름도 붙어 있다. ‘정신을 빼놓는 사람’이다. 이들에게 타인의 사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감이 코앞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어김없이 그 시간을 깨뜨린다. 계획을 존중해 주는 듯 행동하지만 말뿐이다. 새벽에 전화를 걸어 “이 시간에 전화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이라고 말문을 연다. 안 되는 줄 알면서 한다. 잘못은 언제나 남 탓이다.
이들에게는 언제나 자기 일이 가장 급하다. 타인의 정말 중요한 일도 그들의 사소한 일 앞에서 뒷전이 된다. 큰 시험을 앞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연애 고민을 한 시간씩 쏟아 놓는 식이다.
이들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막힌 사람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자기 속이 채워지지 않으니 남의 관심과 에너지를 끌어다 쓴다. 속이 비어 있으니 요구하고, 거절당하면 침묵과 무시로 갚는다.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잘 잤냐” 그리고 끝
식은 사랑은 요란하지 않게, 형식적인 모습으로 후퇴한다. 부부 사이를 오래 살핀 이들은 친밀함에도 깊이의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가장 얕은 단계가 상투적 인사만 오가는 사이이다. 아침에 “잘 잤어?”라고 묻고 온종일 마음이 오가는 대화가 없다면 그 둘 사이는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겉은 멀쩡하다. 인사도 하고 밥도 같이 먹는다. 속만 끊겨 있다. 방을 같이 쓰는 룸메이트일 뿐 영혼을 나누는 단짝은 아니다.
친밀함은 결혼했다고, 함께 오래 살았다고 저절로 깊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가꿔야 자란다. 평온한 날에는 티가 나지 않다가 인생의 폭풍우가 닥칠 때 얕은 사이부터 무너진다. 나이가 들수록 얕은 자리에서 빠져나오기는 더 어렵다. 오늘 얕으면 내일은 더 얕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식지 않는다. “잘 잤느냐”로만 버틴 하루하루가 쌓여서 식는다.
부부만의 진단이 아니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에서도, 매주 얼굴을 보는 성도들 사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은혜 받으세요”라고 인사는 오가는데 서로의 형편은 모르는 사이. 형식만 남고 마음은 떠난 자리. 우리 곁에도 있지 않은가.
감정 체험보다 확실한 증거 ‘회개와 변화’
18세기 미국 대각성 부흥운동 한복판에서 한 신학자가 뜨거운 감정 체험에 취한 사람들의 위험을 지적했다. 자기가 체험한 감정만 절대시하는 사람은 그 체험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 격렬한 반감을 품고, 자기편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전쟁을 선포하듯 행동한다고 했다. 은혜를 말하면서 편을 가르고, 사랑을 말하면서 형제를 지운다. 감정이 우선순위가 되는 순간 관계는 전쟁이 되고, 모든 전쟁이 그렇듯 사랑이 먼저 죽는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만 곁에 남기고 몰라주는 사람은 조용히 지워 가는 시대이다. 우리도 18세기의 그들과 같은 길 위에 서 있는지 모른다.
참된 은혜의 증거가 무엇인가. 앞서 소개한 법학자의 아내가 답한다. 남편의 회심을 오래 지켜본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신기한 영적 체험을 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고 여전히 자기만 아는 인간이라면 신령한 체험이 무슨 소용이에요? 그런데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남편이 기도 후에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걸 알았어요.” 믿지 않던 사람의 눈에도 보인 증거는 뜨거운 체험담이 아니라 자기만 알던 사람이 변해 가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데 사람이 바뀌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죄와 사망과 참혹한 지옥 형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건짐받은 사람들이다. 값없이 받은 그 사랑이 정말 내 안에 살아 있다면 내 감정만 움켜쥔 손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회심이란 본래 자신만을 위해 살던 자아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는 일이었다.
먼저 물으시는 하나님
성경에서 가장 먼저 감정을 물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낯이 어두워진 가인에게 먼저 다가와 물으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창4:6).
잔치에 들어오지 않는 큰아들에게도 아버지가 먼저 나왔다. 하나님은 토라진 사람에게 먼저 물으신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이런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에 이미 들어 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 회복은 감정을 쥐어짜는 데서가 아니라 처음의 행위로 돌아가는 데서 온다.
각각 자기 일만 돌아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하셨다(빌2:4). 오늘 저녁, 식어 버린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안부를 묻는 일이다.
서운함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한 마음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면 그 날은 오지 않는다. 목소리가 어색하면 어떤가.
아버지도 잔치 자리를 두고 문밖으로 먼저 나오셨다. “요즘 어때? 무엇이 힘들어?” 먼저 물으시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먼저 묻는 자리에서 다시 데워진다.
위 글은 교회신문 <960호> 기사입니다.